chapter Europe
시작하기 전, travel journal B의 인트로 읽기
<travel journal B>
오랫동안 써왔던 손노트의 정리입니다.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파리에 맞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Paris'
탁자 위에 이름만 덩그러니 놓아도 느껴지는 풍미가 있다. 향긋한 크로와상, 공원을 배경으로 우뚝한 에펠탑.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화려하고 꽉 차는 루브르, 퐁피두 그리고 오랑주리.
파리가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걸 만끽할 사람이라 나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사실 소리 내어 말해보지 않는다면,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파리로 갔고, 그러나 나와는 맞지 않았다.
파리에서 만난 것은 끝도 없는 관광객의 행렬이었다.
크로와상도 에펠탑도 나에게 와 닿기 전 수 겹의 관광객들을 관통해야 했고, 나에게는 거대한 관광객 뒤에 희미한 잔상만 보일 뿐이다. 운이 나쁘게도 여긴 10월이었고, 이 땅의 10월의 여행은 준비한 모든 옷을 한 번에 입고 나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파리는 추웠고, 여기저기 치였고, 여행에서 꼭 가 닿아야 할 ‘감정’이나 ‘감동’, 혹은 어떤 상태 (만족?)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가 닿지 못했다.
런던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기대’는 만나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파리가 지나치게 상상력으로 만들어졌으나 - 끝내 내가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했던 - 도시였다면, 런던은 한 획의 상상력도 그어지지 않은 곳이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시간들을 대부분 걸으며 보냈고, 충분히 비어있는 공간이 거기 있었다.
The Photographers Gallery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골목에 있다.
거대한 유리벽 안에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몄던 옷깃이 살짝 헤이해 져서 에스프레소 작은 잔을 들거나, 혹은 무채색 두꺼운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카페라고 하기에는 공간은 지나치게 정적이고, 식욕을 올릴만한 것이 없다. 서점이라고 하기에는 구색이 너무 빈약하다.
갤러리는 2층부터 시작한다.
높지 않은 건물인데, 가장 높은 층에 올랐을 때 오른쪽에 모서리를 가득 채운 풍광이 있었다. 통유리였다.
영국의 오래된 동그란 건물 지붕들이 군데군데 점잖게 앉아있었다. 틈틈이 보이는 현대적인 건물도 6,7층이 안 되는 이 건물의 키를 넘지 않는다. 텅 빈 전시공간 안으로 해가 흠뻑 들어왔다. 걷는 걸 의식할 수 있을 만큼 정적이 이 안에 가득 찼다.
파리에서 만났던 그림들은 모두 19세기에 있었다. 오일 물감을 흠뻑 묻힌 캔버스 위를 오들오들 떨면서 우아하게 걸었다면 여기에는 매끈하게 코팅된 인화지들을 사이에 놓여 있었다.
어떤 프레임도 없이 사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작품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Motherhood :
Photography, Motherhood
and Rearesentation
입구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위대하고 경건함 ‘엄마’의 대해 말해줄 법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을 등지고 돌아서면 만나게 되는 건 가정부로서의 엄마였다. 가정부 엄마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녀는 거대한 집 그 자체였다. 형형색색 침대보와 구분되지 않는 그녀의 옷매무세나 엄마의 배에 숟가락을 꽂아두고 있는 아이라니. 광대 같은 표정과 색감들. 다시 고개를 힐끗 돌리면, 성녀 같은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데.
이 아이러니를 양 쪽 벽에 걸어두고 큐레이터는 얼마나 재밌었을까, 갤러리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도 작품 활동인 거다. 경이로움 등 뒤에 유머러스. 현실과 신화적 모성애 사이에 존재하는 절망감이라니.
두 작품 사이에 있는 사진이 5년간의 불임치료 중인 자신의 모습을 작가가 찍은 사진이었는데, 이 사진은 양쪽 사진 사이에서 극대화되었다.
멜라닌 색소가 턱없이 모자란 서양인 작가의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고, 의레 붉을 수 있는 코도 왠지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아무 표정 없이 같은 공간에서 5년간 찍은 사진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폭우 같은 절망이 느껴졌다.
아주 오랜만에 오롯이 공간에 있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얻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서툰 기대는 시간을 망치기 너무 쉽다. 이 공간에서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 자체로 머물 수 있었다.
한 층 위 전시는 자녀가 있는 작가들의 사진이다. 한국의 흔한 예능프로그램 카메랑 앵글이 아니다. 일상에서는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아이를 안고 떠들고 모여 앉아 사랑스럽다고 웃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는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몸을 맡기고 누워있거나, 혹은 아이들을 데리고 불가능한 일들을 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끌벅적한 작품 사이를 지나 이 전시에 포스터로 쓰인 작가의 작품이 나타났다.
젊은 엄마와 아기는 모던하다. 모성애에 경이로움이나 육아의 좌절과 갈등, 혹은 늪과 같은 현실은 그 사진에는 없다. 엄마도 아기도 온전히 카메라 렌즈 쪽을 향하지 않는다. 전시관을 처음 들어섰을 때 만난 것과 동일한 누드지만, 경이와 아름다운의 결이 다르다. 탈색된 옅은 톤은 엄마와 아기를 가장 단순한 선으로 만든다.
현실의 Motherhood라고 가만히 적어둔다. 알 수 없는 것, 만들어 가야 할 것, 나는 겪어보지 못한 시간들. 준비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각자가 그리기 시작할 캔버스 위에 선.
건물을 나오니 어느새 해가지고 있었다.
이후에 계획은 역시 없다. 우선 다시 또 걸어보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