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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ae Feb 09. 2019

영국의 관람객

Chapter Europe

시작하기 전, travel journal B의 인트로 읽기

<travel journal B>

오랫동안 써왔던 손노트의 정리입니다.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 아무도 없었다.  

분명 해가 지지 않았지만, 공기는 무채색이었다. 아주 늦은 밤 또는 새벽의 가운데에 뜻하지 않게 밖에 나선 아이처럼 무뚝히 서 있었다.   

며칠 지내고 알았지만, 해는 밤 10시가 넘어야 졌고 어떤 날은 자정이 지나도 해가 지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여행은 밤과 낮의 구분이 모호했다. 해는 언제 졌던 걸까.  

아저씨가 사라지자마자 정신없이 그렸다.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실례니까. 하지만 항상 지나고 나면 앞에 있을 때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그릴걸 하고 후회하지. 

12시간이 넘는 비행이었고, 런던에 도착한 지 4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길 위에 있었다. 

숙소는 윈드미어에 있었다. 윈드미어를 포함해서 좀 더 올라가면 거대한 호수를 둘러 안은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부터 이 부근까지 모두 레이크 디스트릭트라 불린다. 그리고 이 지역은 전통적인 휴양지다. 휑한 도로에 서서 나는 휴양지라는 단어를 지우고 있었다. 

휴양지라. 그때 앞코가 하얀 지프차가 기차역의 쪽문으로 들어왔고,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 말고도 서넛이 갑자기 차로 뛰어들 듯 같이 탔다.  

환한 한밤을 걸어 우리는 빨간머리 앤이 나올 법한 작은 2층 방에 들어섰고 곧 뻗었다.  


베아트릭스 포터 갤러리는 윈드미어에서 호수를 가르는 배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한다. 혹스헤드라는 마을 안에 있는데, 아담한 집들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작은 마을이다. 입구에 진초록색 작은 카페를 지나고, 오래된 옅은 분홍색 벽을 지나면 옅은 겨자색에 작은 집이 나온다.  

작은 카페에 작은 꽃이 너무 좋다. 


내 머리랑 부딪힐 것 같은 작은 문이 갤러리 입구다. 좌우 문설주와 인방은 올리브색 액자틀처럼 고운데, 인방에 하얀색 텍스트로 쓰여 있는 BEATRIX PORTTER GALLERY 가 내놓은 이름의 전부였다. 사실 윈드미어에서도 딱히 둘러볼 건 없었다. 모두 2,3층의 야트막하고 오래된 건물들이었고 작은 기념품 판매점 같은 게 전부였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모여 있어 관광지 같지만 가만히 돌이켜 보면 런던 뉴욕 이런 이국의 도시에서 느껴지는 위압적이고 요란한 돈냄새는 없다. 덕분에 전 날 내가 한 사치는 놀이공원에 세계 마을 같은 <베아트릭스 포터 월드>에서 피터 래빗과 손잡고 사진을 찍고, 피터 래빗 펜케이크 세트를 사 먹었던 거다. 

이게 전부다. 남편의 사무실이었던 작은 건물 


갤러리의 그림들은 아주 작다.  

그녀의 친구이자 가정교사였던 이의 아들이 아프다고 해서, 편지를 보낼 때 그려줬던 토끼 4마리가 우리가 아는 피터 래빗의 시작이다.  

작고 조용한 공간에 손바닥만 한 그림들이 뜨문뜨문 걸려 있다. 작은 토끼, 고슴도치, 고양이, 채소, 꽃...... 누군가에게 썼다가 보내지 못한 편지도 있을까, 이 아이들은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싶어 그려졌을까.  

이 길에서 만나는 이 동네 사람들은 나보다 두세 뼘은 큰데 도대체 이 공간은 큰 것이 없다. 작은 스툴에 앉아 한참 그곳에 있었다. 날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지만 자꾸 코가 시리고 움츠러들었고, 적막을 따라서 한참 그녀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  

편지에 그려 보낸 작은 동물과 꽃, 자연을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어떨까. 길이나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주 드물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난다. 와중에 정말 그림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 날은 집까지 날아서 간다. 내 그림이 좋다니. 내 그림이 좋은가요? 한 번 더 물어서 그 말을 다시 한번 더 듣고 마음에 꼭꼭 넣어두고 싶지만 그러면 그 말이 날아가버릴까 봐 나는 앞니를 꼭꼭 숨기고 빙그레 빙그레 제자리에서 발만 구른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건 잊지 않는다  

1) 피터 래빗 이야기 초판 표지

피터 래빗 이야기의 첫 출판은 자비출판이었다고 한다. 

난 내 그림을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가 매번 어려웠다. 그녀는 어땠을까. 많은 출판사가 거절한 피터 래빗 이야기를 자비출판을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2주 만에 동이 나서 정식 컬러 판형으로 출판할 수 있었을 때. 100년도 더 지난 그녀의 이야기를 아직도 사람들이 읽고 그녀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작은 갤러리에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 보내준다는 건?

수신자가 명확한 글과 그림은 ‘편지’가 된다. 발신자의 마음은 명확하지만, 가 닿을 이들이 알 수 없지만 나와 또는 내 친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게 책이 되거나 그림이 되는 게 아닐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버스를 놓쳤고, 용감하게 부둣가까지 걸었다. 그리지 않을 수 없어, 용감하게 걷다가 지치면 쭈그려 앉아 각기 다른 빛의 초록을 그렸다. 

풍경 속에 그림을 놓아두면 너무 초라한다. 그 공간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다시 그때의 초록의 기억을 가지고 이렇게 한없이 반짝인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부유한 집 딸이었는데, 그게 아마도 당시에는 그녀가 가진 가장 커다란 형용사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녀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은 그녀가 환경운동가이자 식물학자였으며, 농부였다는 것이다. 돌아와서 그녀의 삶을 그림보다 더 많이 생각했다. 아주 조그마했을 때부터 작은 꽃과 나무들을 보고 그려두는 걸 좋아했던 사람.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여자라서 식물학자로 남지 못했던 삶.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을 그리고 그려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상에 남았다.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걸 다하고 싶다. 그게 뭐든 나는 놓고 싶지 않다. 이건 욕심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내 마음이다. 그럼에도 자꾸 회사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꾸준히 운동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나는 쪼여지고 넘어지고 다친다. 그럴수록 문득문득 그녀의 삶이 기억 속에서 둥실 떠오른다.

포터의 그림과 이야기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냥 농장에 작은 토끼 이야기다. 거대하거나 웅장한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긴 시간 촘촘히 구축한 세상은 견고하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식물학자, 농부, 환경운동가 각기 다른 이름들을 관통하는 게 있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 안달복달하지 않고, 넘어지거나 다쳐도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마음.

모르겠다. 나는 그냥 오늘도 많이 좋아하면서 살고 싶다. 




1) 피터 래빗 이야기 초판 정보 

https://books.google.co.kr/books?id=pyd_DgAAQBAJ&hl=ko&source=gbs_navlinks_s

2) 알라딘에 상세히 적힌 베아트릭스 포터 프로필

https://www.aladin.co.kr/author/wauthor_overview.aspx?AuthorSearch=@101656

3) 참고 

주간조선 2288호 2013년 12월

 [아일랜드·영국작가에게보내는 편지] 영국 호수지방 베아트릭스 포터 만나러 가는 길

허밍턴포스트 2015년 7월 ‘피터 래빗'을 탄생시킨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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