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있을까?
아이가 셋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내 아이만 셋이다. 누군가에게 아들셋이라고 말하면 연민과 안타까움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하는데 나는 그 눈빛을 모두 반사시킨다. 아이가 많다는 사실에 그런 시선을 보내는 분들은 대부분 육아를 고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 덕분에 더 다양한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고 동심으로 돌아가 인생을 정말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둘째와 셋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린다. 내 차량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집안에 차량 출입 신호가 방송되는데 그걸 듣고 미리 나와 있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아빠! 보고 싶었어!" 하며 안아준다. 가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을 땐 추운데 왜 나와있냐며 얼버무릴 때가 있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다른 이웃들도 그 모습을 보며 함박 웃음을 짓곤한다. 첫째는 요즘 시크해지긴 했지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가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기도 하는데 그때부터 엉덩이 춤 배틀이 벌어진다. 둘째와 셋째까지 가세하면 정말 가관이다. 아내님은 그만하고 얼른 씻으라고 하지만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일에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나를 보면서 웃을 일이 많아 좋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출근하고 난 후 아내님께 전화가 왔다. 평소에 전화할 시간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더니, 셋째가 아빠한테 '파이팅'을 해주지 않아서 현관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아이가 일찍 일어나 잠결에 "아빠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자기가 못해준 말이 더 있어서 그게 미안했다고 한다. 전화기 너머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랑해,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발차기, 파이팅."이라고 말하는 셋째를 꼭 안아주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왔다. 전화기 너머로 손을 뻗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부터 아이가 깨어있을 때는 한 번 더 안아주고 서로 파이팅을 외치며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안아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인생을 살아 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육아를 한다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시간이 많아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본다. 쉽게 정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거 하나는 알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간다는 건,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인생에 공허함을 느끼거나 일이나 인간관계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가족에게만 온전히 집중한다면 그 공허함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아이 눈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아이가 하는 말을 깊이 받아들이고, 아이 품에 깊이 안겨 그들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면 세상이 달라 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