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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한량 Jan 12. 2019

마음의 방 채우기

당신의 정원* 열두 번째 인터뷰. 마음이 텅 비어버린 이에게  



마음의 방 채우기

(인터뷰 당시 나이 33세, 남자)



최근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시나요?


왜 행복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요즘 들어 부쩍 인생이 전반적으로 공허하다고 느끼는 때가 많다.


어? 의외네요. 모든 직장인의 꿈인 자기 회사도 만들고, 꾸준히 작품도 짓고 있어서 무척 행복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글쎄, 나도 이상하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대학생 때 아버지가 갑자기 다리를 다치셔서 일을 더 이상 하실 수가 없었고, 그와 동시에 치열한 삶이 시작됐다. 학부생 때도 대학원생으로 공부를 할 때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 했었다. 지금 보니 대학생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중 안 해본 게 없다 느껴질 정도로. 한 20여 종 되려나? 내가 해 본 아르바이트 중 최고는 임상시험 아르바이트였는데 무슨 약을 먹고 경과를 지켜보는 일이었고 약간의 부작용이 있는 것 같아 다신 안 가기로 했다. 아무튼, 그만큼 돈이 없어 절실했던 경험들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이 조금 컸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내가 내 회사를 꾸려나가고 일이 잘 풀려 생활이 넉넉해지면 자연스레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이상하게 전보다도 더 공허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행복해지는 조건에 애초부터 돈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꿈을 꾸며 산을 밟고 또 밟아 올라갔는데 정상에서 모든 걸 이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진정 원한 것이 아니었거나 혹은 더 이상 갈 길이 없다고 생각돼서 공허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해요.


듣고 보니 그런 기분이 든다. 한 챕터를 잘 넘기고 나니 인생이 서론부터 다시 시작되는 느낌. 한 길로만 걸었는데 더는 길이 없는 느낌. 만족 못 하는 병에 걸린 느낌.


이제 반대로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먹은 것처럼, 지금까지 지내면서 좋았던 기억들로 돌아가 볼게요. 어떤 기억들이 있을까요?


먼저, 유년기에 부산에서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말만 들어도 따뜻한, 고향에서의 나를 속속들이 다 아는 동네 친구들과 만나 놀고 술도 마시고 했던 일들이 참 좋았다. 다음으로, 절에 갈 때가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찰마다 생김새를 구경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곳에 가면 늘 마음도 편해지기에.


유년기의 친구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죠. 요즘 생활 반경이나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무척 단조롭다. 회사-현장-집을 반복하는 일상이다. 그렇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은 고객, 회사 동료들,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전부다. 어쩌면 내가 공허한 진짜 이유는 요즘 들어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좋은 동네에 지내면서도 동네 한 바퀴를 같이 돌며 대화할 사람이 없다. 아마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제 어느 정도 원하던 것들을 이뤘으니 삶에 공기구멍들을 좀 넣어서 숨도 쉬고, 사랑하는 사람과 선선한 가을밤 동네를 걷기도 하고, 사찰여행도 하면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아마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 회사를 만들게 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첫 시작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인턴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을 겪고 하루아침에 잘렸다. 단지 내 계정의 SNS에 회사에 대한 내 생각을 올렸을 뿐인데, 며칠 뒤 상사로부터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황당한 말을 듣게 됐다. 소통과 직원들 간의 열린 관계를 중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던 회사라 충격은 더 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한 감정으로 누워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다음날 거짓말 혹은 기적처럼 대학원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같이 프로젝트를 하나 해보자는 소식. 그 길로 첫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감사하게도 같이 일했던 분들이 다음 프로젝트들도 연결해주셔서 계속 일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일을 하면서 내 행동 하나, 결정 하나에 회사가 휘청할까 무섭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배워가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도 하면서 열심히 키워보고 싶다.


사람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색일까요?


무지개색

좀 복잡한데, 입력은 까만색이고 출력은 무지개색으로 되었으면 좋겠다. 나라는 사람 자체는 그렇게 색채가 화려하진 않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무지개색의 다채로움을 뿜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 인터뷰가 끝나고 당신이 내일 죽는다고 가정해봅시다. 내 자신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그래, 쉬어라.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다. 만약 곧 죽는다면 맘 편히 쉬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할걸’하는 후회가 들 것 같기도 하다.





인터뷰를 마친 뒤


집이 비어있으면 가구를 사면 되고, 허허벌판엔 나무를 심어 녹음을 키워낼 수 있지만, 마음이 비어있으면 도대체 무얼 해야 하나. 공허함이라는 것은 어쩐지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채우기 힘든 공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요즘 너무 공허해’라고 말했던 친구의 고민이 마음에서 보낸 긍정적인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삶의 급류에 정신없이 떠밀려 살았던 친구는 물살이 잔잔해진 강어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얘, 여기 이 안은 텅텅 비어있어’라고 외치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고, 그 황량한 벌판이 내 것이라는 인지는 앞으로를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 서서 그는 아마 많은 생각을 해볼 것이다. ‘내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인가?’, ‘내가 뭘 했을 때 가장 행복했더라?’하는 류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스스로 던져볼 테고, 그 과정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와 얘기를 하고 난 뒤, 왜 공허한지 모르겠다고 시작한 인터뷰지만 결국 그는 답을 알고 있구나 싶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행복했고,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면서 영감을 얻을 때 신이 났으며, 가수 정준일의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하고, 사찰의 공기로 몸속 깊숙이 호흡하며 안정을 얻었다. 

어쩌면 마음의 방을 채우는 데에는 큰 가구나 멋진 나무들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이런 작은 요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배가 불러진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내가 어느 때 가장 밝게 웃는 사람인지.  





마음의 정원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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