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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한량 Jan 12. 2019

먼 길을 걷는 달팽이

당신의 정원* 열한 번째 인터뷰. 늦어도 괜찮다.



먼 길을 걷는 달팽이

(인터뷰 당시 나이 21세, 남자)



최근에 주로 하는 고민은 무엇입니까?


학교생활을 잘 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을 나태함 때문에 원만하게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학기가 끝난 지금은 스스로 반성의 시간도 갖고 있다.


지난해 대학교에 입학했죠. 대학 생활은 어때요?


지방의 모 학교에 다니고 있다. 처음엔 집에서 멀리 떨어진다는 게 조금 걱정됐지만 적응도 차차 해가면서 이제는 이 학교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역시나 타지에서 지내다 보니 익숙한 것도 하나 없고 대화가 부족해 심심하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낯선 장소에서 살아간다는 건 것은 그런 느낌이 있죠. 이해해요! 어떤 대화를 할 때 즐거움을 느끼나요?


스포츠 얘기를 할 때. 남자 동기들과는 가끔 야구 얘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같은 두산 팬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그리고 학과 특성상 답사를 많이 다니며(역사학과) 역사 얘기를 하는 것도 좋다. 또 최근에는 시기상 정치 얘기도 많이 한다.


어디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 가고 싶은 곳들에 관해 얘기해 주실래요? 해외에선 어디에 가고 싶은지, 또 국내에선 어디에 가고 싶은지.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좋으니까요.


중국과 일본.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걸어보고 싶고 자금성도 가보고 싶고 산둥지역 자장면과 북경 오리도 먹어보고 싶다. 일본에선 신칸센도 타보고 싶고 목조 저택과 고분도 보고 싶다. 국내에선 정동진, 부산의 해운대와 사직야구장,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 가고 싶다. 삼성구장에서 이승엽 은퇴경기 때 홈런볼을 얻는 게 소원이다.


이승엽 선수가 올해 은퇴하나요? 은퇴경기 홈런볼을 받으면 엄청 영광스럽겠네요.


잠자리채라도 들고 가서 잡고 싶다. 간직하려는 생각은 아니고 받자마자 그걸 팔아서 중국과 일본에 여행 갈 자금을 마련할 거다.


최근 성년의 날을 맞이했고 이제 진정한 이십 대가 되었는데, 옛날과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음, 10대에 비해 지금은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뭐 아직 부족하고 바보 같은 소리도 많이 하지만. 그리고 살을 빼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면 지금은 음식조절도 하고 물도 많이 마시려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체중 감량을 많이 했다. 또 이건 앞으로 고치고 싶은 점인데, 나태함과 게으름에서 멀어지고 싶다.


십 대 시절 기억에 남는 일들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우선 흑역사들이 있다. 중학교 때 괴롭힘을 당했던 적도 있었고 게임을 하다가 현질(현금 구매)에 거짓말까지 해서 많이 혼났던 적도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게임에 돈을 쓰지 않고, 이전의 괴롭힘이 사실은 내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서 더 그랬다는 것도 안다. 그 애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좋았던 기억으로는 세종대왕 글짓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일, 아빠와 야구장을 다녔던 일, 미아가 될 뻔했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의연하게 대처했던 일, 거북이 마라톤을 완주해서 메달을 받았던 기억, 남자들끼리 여행을 가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터놓고 했던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흑역사들마저도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추억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게으름, 나태함, 그리고 소통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단점들이다. 지금의 나쁜 습관들을 고쳐 먼저 사람이 되고, 그다음에 어떤 사람이 될지 생각해 볼 것이다. 인생은 마라톤인데 초반부터 스퍼트를 내면 후반부에 지치지 않을까. 해서 천천히 가다가 때가 되면(인간이 되면) 빨리 달려 나갈 것이다.


사람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색입니까?


회갈색

회색도 그렇고 갈색도 뭔가 흐리멍덩하고 애매한 색깔인데 내가 지금 그런 딱 상태인 것 같다. 혼자만의 세계에만 갇혀 세상을 잘 모르는 바보 같은 나와 닮아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느리게나마 점점 열정을 지닌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싶다. 아마 내가 스퍼트를 내서 달릴 때 비로소 빨간색이 되지 않을까?


오늘 인터뷰를 끝으로 당신이 죽는다고 가정해보세요. 나 자신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은 무엇이 될까요?


너는 가끔 멍청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어.

내가 싫어하는 모습도 있고 바보 같기도 하지만, 기억하기 싫었던 일도 이젠 극복해서 자신 있게 얘기하고, 꿈을 갖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볼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선천적으로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난 친구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다소 생소한 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치료하고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금은 서툴지만, 세상 속에 조심스레 발을 딛고 살아가는 중이다. 자신이 가락국수 사리 같은 뇌를 가졌다며 끊임없이 자책하는 모습에 나 또한 그의 바보스러움을 인정하며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약아빠져서 제 잇속만 챙기는 사람, 똑똑한 머리로 비윤리적인 일들을 저지르는 사람, 겉과 속이 달라 남들의 뒤통수를 치는 사람, 제 잘난 맛에 취해 남들을 멸시하는 사람, 냉정함과 표독스러움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이 숨 막히는 지구에서 순수한 바보의 존재는 어쩌면 세상을 좀 더 말랑말랑하게,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완충지대가 아닐까 하고. 비록 굼뜬 걸음일지라도, 이 장기적인 레이스에서 스퍼트를 내 멋지게, 새빨갛게 자신을 꽃피울 수 있는 그 날을 언젠가 꼭 맞이할 수 있기를, 걷고 또 걷는 지난한 과정 중에 지치거나 혹은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세상에 섞여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에게.





마음의 정원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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