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과장님이랑 같이 먹는 날, 나머지는 우리 팀 같이 먹어. 구내식당이 없으니까 코로나 때는 포장해서도 많이 먹고, 뭐 나가서 먹기도 하지.”
“매일 같이 먹어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보신다.
새로운 자리와 사람들 그리고 과중한 업무에 적응하느라 매일 쪼그라들었다. 티타임은커녕 볼 일 급할 때는 누가 화장실 좀 대신 가줬으면 싶었다. 물리적인 분주함 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부서 내 모두를 챙겨야 하는 그 자리를 감당하는 게 나에겐 힘들었고, 처음 대하는 업무를 처리할 때 한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 괴로웠다. 닷새 중 사나흘은 야근까지 이어졌고,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혼자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오는 날이 허다했다. 주말에도 하루는 꼭 나와 일을 해야 업무가 소화되었다.
하루 가운데 낀 점심시간은 말 그대로 낀 시간이었다. 오전 오후의 업무 사이에 그저 있었고, 흐르지 않는 관계 사이에 끼어있었다.
중간에 뭐라도 해소되는 게 없고 더 얹혔다.
외로웠고 갑갑했다. 동동거렸지만 멈춰있었다.
“팀장님, 점심 말인데요. 일주일에 하루만 같이 먹어요. 나머지는 각자 먹고요.”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팀장님은 날 보시다가 “하루만? 왜?”
“숨 막혀요.”
팀장님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았다. 동석한 팀원들의 입을 벌린 얼굴과, 동시에 일말의 기대감이 담긴 눈빛도. 그 공간의 공기에 다 느껴졌다.
미처 막지 못하고 튀어나온 말에 나도 놀랐다. 이 놀람은, 내 감정에 꽤적절한 말을 선택한 데 대한 것이어서 한편 담담했다.
나밖에 모르던 인간이었다.
그 인간이 15년의 직장 생활에서 꾸준히 정에 맞은 결과, 모난 부분을 잘 숨기는 법을 체득했으며, 최소한 겉으로는 둥글둥글해졌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십 수년간 다스려온 모난 돌부리를 채 숨기지 못하고 투명하게 드러낼 때가 있다. 그 ‘때’는 내가 안다. 뇌가 위기상황이라고 느낄 때. 지금은 위기상황이다. 이렇게 소리 내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 또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어떻게 안 되는지'.
나의 방법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력이 떨어지거나 몸살기가 있으면 병원에 가 포도당 주사를 맞는다. 나는 혼자 있으면 에너지가 채워진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혼자면 된다.
미룬 책을 읽기도 하고, 혼자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가기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도 한다. 쇼핑하기도 하고, 꽤 먼 거리를 차 타고 가 그 곳에서 종일 걷기도 한다. 어설프나마 피아노 연습에 열중하기도 한다.
일에, 육아에 지쳤으면 거기서 잠시 멀어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주 틀리지는 않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늘어져 있을 수도 있고, 친구와 만나거나 지인들과 술 한 잔에 시끌벅적한 수다를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나의 욕구라는 게 조금 다르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충족되지 않는다. 오히려 뭘 한다.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또 뭘 그리 많은지. 나가기도 좋아한다. 그런데, 혼자하면 더 좋다.
나 또한 ‘인간(人間)’이기에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도, 관계도 즐겁다. 그런데 그 시간 후에는 다시 별도의 내 시간을 보내야 기(氣)가 채워지는 거다.
조잘조잘 사랑스러운 아이들과의 놀이는 행복하다. 그러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이에 빠지거나 숙제를 할 때는 나도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책을 집어든다.
점심시간을 얻었다.
근로시간에, 급여에 포함되지 않는 당연한 나의 한 시간을 ‘쟁취’했다.
존재하지 않는 ‘아무거나’를 맞추지 않아도 되고, 신성한 음식을 먹으며 업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 언제부턴가 ‘원 플러스 원’처럼 식사 후 우 하고 카페로 이동해 커피를 의식 없이 소비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커피 애호가는 생각했다.
아침에 좋아하는 국, 반찬과 밥을 내가 먹을 양만큼 보온도시락에 담았다. 기분이나 재료에 따라 메뉴는 샌드위치나 샐러드가 되기도 했고, 후식까지 야무지게 담았다. 아이들은 엄마가 기분 좋게 도시락 싸는 모습을 근사하게 여겨주었다.
내 오른쪽, 조수석에 자리 잡은 도시락을 본다. 이게 뭐라고 출근길이 아니 하루가 든든하고 뜨끈하다. 안전띠라도 매 줘야 하나.
전쟁 같은 오전을 보내고 팀원들과 ‘점심 맛있게 드세요.’ 인사를 나누며 건물 밖으로 나온다.
혼밥을 하는 나의 아지트가 두세 군데 생겼다. 동행은 도시락과 돗자리, 선글라스와 이어폰.
경치 좋은 곳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는다. 조용하다. 밥이 이리 맛있다니. 머리 위로 꽂히는 직사광선의 지글지글한 느낌을 조금 더 즐긴 후, 걷는다. 운동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짧지만 유일한 시간. 귀로는 육아나 교육 관련 영상이나 자기 계발 영상을 듣는다. 역시나 워킹맘이 아이들과 나 양성을 위해 쓰는 시간은 이때뿐이다.
종종 동전 노래방을 가서 한 시간 동안 거금을 쓰고 오기도 한다. 비 오는 날에는 차박하는 기분으로 차 안에 누워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점심시간을 사수한 이후 직장 생활이 조금 할 만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 않나. 짧은 한 시간이지만 허락된 시간 동안 잭을 꽂고 초집중해서 에너지를 고속 충전할 수 있게 되었다.
“숨 막혀요.”
다소 직설적이었다. 주변을 불편하게 했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 말이 튀어나온 순간 비로소 내 감정을 제대로 인식했고, 어루만질 수 있었다.
작고 큰 자유를 주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나에게.
대상을 아끼는 게 사랑이라면, <강원국의 글쓰기> 저자의 일화에서처럼 이 날 이후 나를 조금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