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는 다르다.
나는 네가 반갑고 너는 우리에게 후하다.
아침에 거실벽 한쪽을 비추기 시작하더니, 거실을 거쳐 주방까지 깊숙이 들어와 온 집안을 환하게 밝힌다. 그 과정을 시시각각 알아차린다. 오전 시간 동안 서서히, 그리고 점심 무렵이면 절정에 달하는 이 광경을. 이 시간에 집에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귀한 모습이기에 요즘 날씨가 허락하는 한 매일매일 지켜보고 매번 감탄한다.
내게 여유나 풍요로움은 이런 것이다. 이걸 누리고 있다니.
몇 년을 꼬박, 맞벌이인 남편과 나를 대신해 친정엄마가 오셔서 아이들을 챙겨주셨다.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야 늘 있지만 방학 때는 더욱 편치 않다. 에너지 넘치고 각자 내 세상에서 사는 세 아이와 오후 단 몇 시간이 아니라 하루 ‘죙일’ 함께하는 것이,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이라도 칠순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어찌 버겁지 않으랴.
“야야, 괜찮다. 애들이 얼마나 잘 노는데.”
엄마는 이렇게 말해도 내 마음은 안 괜찮다. 그리하여 방학에 운영하는 방과후교실을 이것저것 최대한 신청했다. 엄마의 메뉴 고민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까 싶어 냉장고에 식재료와 간식도 동나지 않게 채워둔다. 이른 등교 준비 안 해 편하지만, 한 끼라도 해결해 놓고자 아이들을 깨워 같이 아침을 먹는다. 딸 부부 출근 시간 맞추어 우리 집으로 출근한 엄마에게 짧은 인사를 나누며 나선다.
“아이구, 엄마 오늘도 고생하시겠네.”
“아이구, 네가 더 고생이지.”
이 만남의 순간에 고마움과 미안함은 극에 달한다. 몇 년을 반복해도 결코 덜해지지가 않는다.
이제 너무 어리지 않아 놀러 데리고 다니기 딱 좋은 아이들을 집에서만 보내게 해 미안하고, 평생 일하다 퇴직한 지금, 놀기 딱 좋은 나이의 우리 엄마가 아까워서 죄송하고. 이래저래 송구한 마음이 긴 방학 기간에 비례해 커지는 시간들.
이렇게 십 수 번의 방학을 보냈고, 작년 여름 휴직을 했다. 계획과 다짐이야, 수도 없었으나 십오 년 차 직장인의 휴직에 고민할 요소는 다양하고도 무거웠다. 쉽지 않은 결정에 이어, 들어갈 시기를 정하는 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방학이었다.
현실적인 이유와 상징적인 의미 둘 다였다. 아이들 방학에 나도, 간절히, 방학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방학을 보내는 중이다. 사십여 년 인생에서 손에 꼽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얼마나 염원했던가. 간절했던 것, 원했던 거, 차곡차곡 벽돌 깨듯 해나가고 있다. 다만 어디 내놓고 자랑하기엔 참으로 소소한 것들이라 그저 가만히 누리고 신나 하고 있음이다.
이를테면 뭐 이런 것들.
방학 중 방과후교실은 전적으로 아이들의 선택에 의한다(전엔 내 엄마 편하게 하고자 아이에게 ‘하나 더 할까’ 떠보고 권하곤 했으니).
삼시 세끼와 때때 간식을 연구하고 해 먹인다. 수줍은 요리 솜씨를 오로지 정성으로 쌈을 싸서, 자기네들 말로 ‘한창 성장기’인 먹깨비들을 당해낸다. 내 교과서가 된 <백종원이 추천하는 집밥 메뉴>, 유 선생님(유튜브), 엄마 전화 찬스 등을 총동원하는 건 안 비밀.
겨울의 늦은 아침 해가 중천인데도 한밤중인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태도가 이렇게 느긋할 수가 없다. 크느라 그리 자는구나. 그래, 쑥쑥 커라(다섯 식구가 다 같이 여덟 시에 출근하던 그땐 눈뜨기 힘든 아이들 딱해하며 그러나 동동거리며 깨워야 했는데).
아, 딱 이때.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끓는 물을 부어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있자면, 비록 지금 앞치마를 입은 채인 나여도 커피 광고에 나오는 모델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다. 음. 세제 광고 정도는 먹히려나.
또한 이럴 때. 발이 나만해지려 하고, 제법 통통해져 똑 고만할 때의 내 얼굴과 몸과 똑같아진 열두 살 딸아이가 책 읽어달라며 가져와 엄마 무릎을 베고 눕는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만 읽어줘야지’ 생각하는 거의 동시에 제법 묵직한 머리의 무게가 느껴진다. ‘곧 저리겠군.’
아직 보드라운 아이 머리를 스윽스윽 만지며 책 읽어주는 이 시간은, 아이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날이 되도록이면 천천히 오기를 (속으로)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침이 늦고, 누구랄 것 없이 함께 뒹굴거리고, 긴장이라고는 없는 방학이지만 그 사이에도 소박한 루틴도 생겼다.
아침 식사 후 말끔하게 식탁부터 정리한다. 정말이지 多용도인 그 공간에서 같이 모여 각자 할 일을 하는 시간이다. 예비 5학년 첫째는 지난 수학 복습과 영어책 청독, 2학년 되는 쌍둥이 두 아들은 이야기책 읽기. 나 역시 거기 앉아 엄마로서 말고 ‘내’ 할 일을 한다. 내 영어책 낭독하고 녹음하기 그리고 독서.
점심을 먹고 나서 아무 일정 없이 통으로 비는 오후에는 어김없이 도서관행이다.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쌓아놓고 낄낄거리든, 작업방에서 만들기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자유다. 나는 아이들 책을 몇 권 골라놓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리 잡고 앉아 내 책에 빠져 있다. 서로 터치하지 않는 최고의 시간. 그래, 아이들과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는 것 또한 방학에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이렇게 보낸 겨울방학이 끝날 날이 코앞에 두고 있다.
방학 생활에 익숙해짐을 넘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이 게으른 공기가 달콤하다.
그런데 음.
나는, 저기.
너무한 단맛에는 살짝이 엉덩이를 빼고 싶어진다.
일관되게 아메리카노만 찾다 가끔 친구 추천이나 유명세에 이끌려 무슨 무슨 라테를 마셔본다든지 하는 시음 수준으로도 달달함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는 나다. 그러니까 딱 지금까지 정도의 꿀맛, 이거면 되었다. 충만하게 누렸을 땐 미련이 없는 법. 감사한 마음으로 절로 다음 단계를 기다리게 된다.
그럼 그렇지. 개학이 다가오고 있다. ‘마침’.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첫머리가 ‘방학이 벌써 한 달, 그러니까 똑 반이 지났다.’였다.
'벌써'라니. 한 달 전의 나는 겸손하지 못했구나. 아직도 같은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무려, 방학이 끝나기 이틀 앞둔 날이며, 개학 준비한다고 아이들이 다시 일찍 일어나기 시작한 날인 것이다.
거봐라. 방학을 만끽하느라 글 하나를 못 쓰고 제쳐둔 거.
이틀 후부터는 내가 무슨 엄청난 필력을 자랑할 것마냥 드릉드릉하는 것을 비롯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단계들을 떠올린다. 설레기까지 하다.
글 앞과 뒤를 몹시 다르게 만드는 이런 양가감정이라니. 엉큼하도다. 그러나 언제든 어느 쪽에든, 진심이라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인정해 주기로 한다.
방학 때와는 조금 다른 많은 것들이 또 스스로를 충족시켜 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귀한 한때를 꽉 차게 만들어준 방학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