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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Jun 26. 2023

나도 갓이 놀아!

삼 남매의 휴일


오늘은 좀 오래가는데? 뭐, 다행이지.


황송한 고요함을 즐기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때가 되었는데’ 하는 불안함이 움튼다. 틀린 적 없는 그 슬픈 예감을 모를 리 없다. 닥칠 때까지는 모른 척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방문이 열리고 쿵쿵거리며 나오는 소리가 난다. 사건 발생.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거실로 나온 아이는 2호. 얼굴이 벌게진 채 씩씩거리며 방을 노려보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 방안을 고개를 돌리니 1호가 '난 잘못 없는데요?' 하는 표정으로 억울함을 말하고 있다.

일단 조금 더 억울해 보이는 거실의 아이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이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채 한마디 한마디 사이마다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 바람에 순탄하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알겠다 대략. 누나가 그랬어!


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이가 말해볼래."

1호는 2호보다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입을 뗐다. 그런데 말을 할수록,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사춘기의 여러 징후 중 하나라는 ‘자주 억울함’을 자주 시전하는 요즘 1호다). 콧평수가 커지고 턱이 점점 들리고, 아니이~ 참나, 그게, 이런 단어가 내용보다도 많아진다. 그렇지만 역시 요지 파악은 되었다. 쟤가 먼저 그랬어!






우리 집 맹구들 셋이 같이 놀 때면 높은 비중으로 끝이 이렇다. 오늘 같은 정도의 사건은 평이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위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이 아니면 허용하며 키웠다(이 두 가지 원칙에는 예외를 주지 않았다). 다만 너희 셋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를 테면 서로를  둘 대 하나로 편을 가른다든지 인격적으로 놀린다던지 하는 것에는 개입을 했다. 구성원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면서 유치하고 요상한 모양으로 놀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니 오늘처럼 누가 먼저인지 누가 더 심했는지 가늠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서로를 놀리는 게 발단이 되고 동시에 놀이의 끝이 되는 일도 잦아졌다.



분명 인생이 다 똑같지 않지만, 부모가 아이가 지금 가는 길을 먼저 밟아봤고 ‘비슷한’ 경험을 해본 존재라는 게 다행이라 생각할 때가 있다. 라떼는 너만 할 때 안 그랬노라 하늘땅 별땅 퉤 퉤 퉤, 하며 손에 결코 장 못 지질테니 말이다. ('난 안 그랬는데?'는 미화된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나를 키운 내 부모님이 뒤늦게 굳이 증명하시곤 한다.) 이 경험 덕에 아이들을 키우며 이 정도로나마 겸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학교에서 아주 그냥 ‘고런’ 것을 집중적으로 배워오는 습득력이 그저 놀랍고, 장난이 마려워 못 참겠는 심정을 알겠고, 뒷일 생각 안 하고 써먹는 바람에 끝내 오늘 같은 결말을 맞고 엄마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뒤끝은 더 힘든, 이 초등학생 아이들이 그래서 너무너무 너무나 귀엽고 마는 것이다.


 2호의 시뻘게진 얼굴과 1호의 벌름거리는 콧구멍, 그리고 다 모르겠고 그저 다시 놀고 싶은 3호의 눈망울이 나는 다 귀엽고 재미있고 웃기지만, 지금은 살짝 숨긴다. 그럴 타이밍이다. 십 년 차 엄마는 능구렁이나 진배없다. 그런 척, 아닌 척, 웃긴 척, 화난 척, 졸린 척, 안 힘든 척 등이 적재적소에 가능하다. 이 또한 십 년 전에는 해본 적 없고 할 필요도 없었던, 육아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척이라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이가 이렇게 저렇게 한 것 때문에 □□이가 마음이 상했어. 네가 같은 입장이면 기분이 어땠을까.”

인정한다고 한다(다행이다). 사과도 한다.

“□□아, 미안해.”

이번엔 2호에게 똑같이 한다. 누나가 선례를 보여서인지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사과도 한다.

1호가 먼저 손을 내민다. “도진아. 다시 놀자.”

2호가 대답한다 “싫어. 안 놀거야.”아직 분이 안 풀렸다.

머쓱해진 1호가 샐쭉해서 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엄마, □□이가 이거 줬어요.”

설거지를 마저 끝내고 정리하고 있는데 1호가 곁에 와 종이를 내민다.




어쩜. 문구에 가득 묻어난다. 아직 완전히 누그러지지는 않은 화남. 그럼에도 나 빼고도 잘 놀고 있는 무리에 대한 질투. 어서 합류하고픈 조급함.

투명하게 드러나는 쪽지 위의 화남체는, 방문 아래 틈으로 쪽지를 구겨질까 조심조심 밀어 넣었을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극한의 사랑스러움으로 엄마를 무장 해제시켰다. 난 이번에는 함박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1호가 나와 똑 닮은꼴로 마주 웃는다.


 삐질삐질 문아래로 들어오는 쪽지를 보고 마음이 풀어졌을 1호의 모습 역시 안 봐도 그려진다. 왜인지 조금은 웃음을 참으며 문을 열어 맞아주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조금 전 그들의 다툼을 중재한 엄마 걱정할까 봐, 또한 동생의 쪽지가 그만 귀여워 엄마와 공유하러 달려왔을 터다.


2호는 자못 심각했겠지만, 누나가 활짝 열어준 빛의 문을 통과해 다시 소굴 아니, 놀이의 장으로 입장했다. 가장 반기는 건 3호다. 절친이 돌아와서인지, 다시 놀 수 있어서인지 마구마구 좋아하는 3호의 환호에 모두가 덩달아 신나는 기분이 되었다.  아이들이 아니면 이렇게 예쁘게 투명할 수 있을까.  


쪼잘쪼잘 수다 떠는 셋의 목소리가 다시 골고루 들린다.

되찾은 이 평화에 감사하고 안도하며 나는 내 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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