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꼭 데리러 오세요! 보여줄 게 있어요.”
“응. 오늘? 그래. 그럴게. 잘 다녀와~”
썩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 나를 본다.
둘째 쌍둥이가 작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2시 30분쯤, 학교 수업을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학교로 데리러 갔다. 쏟아져 나오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여전히 책가방 맨 유치원생처럼 쪼마낳고 귀엽기만 하다. 짹짹, 삐약삐약.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걸어 나오며 나오는 아이들, 그새 장난이 마려워 친구에게 장난을 걸고 잡기놀이로 만들고야 마는 개구쟁이들, 문을 나서자 마다 냅다 뛰는 아이들. 어딜 바삐 가느라 서두르나 싶었는데 두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퐁퐁 솟는 에너지를 품은 채 교실에서 움츠려 있다 밖으로 나오며 분출되는 모양이었다. 그 아이들의 해사하게 상기된 표정을 보며 나도 같은 얼굴이 된다.
입학하면서 다른 반에 배정된 쌍둥이는 나오는 시간도, 나오는 모습도 다르다. 도진이는 안내장에 있었던 하교 시간 12시 30분 정시에 나온다. 1년간 어김이 없었다. 도재는 이십 분 정도 후인 12시 50분에야 나타난다. 이 역시 어김이 없었다.
도진이는 신발을 갈아 신고 나오면서부터 벌써 눈으로 엄마를 찾는다.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면 곰세 환해진 얼굴을 하고는 앞머리로 가르마를 만들며 전속력으로 달려온다(그러다 넘어지기도 했다). 꼬옥 안아주고 나면 “엄마 이것 봐요.” 하며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학교에서 받은 안내장을 건네거나, 쉬는 시간에 종이접기 한 색종이를 연신 꺼내며 자랑한다. 점심 급식에 뭐 먹었는지 등등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교실이 먼 도재가 저어 기서 모습을 드러낸다. 도재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슬렁슬렁 걸어오다가, 엄마를 알아보고는 마주 손을 흔들거나 보통은 씩 웃는 게 전부다. 팔을 활짝 벌리고 뛰어와 안기는 일이, 있었던가. 어쨌든 학교에서 전화 오는 일 없이 건강하게 마치고 나온 게 기특해 역시 꼭 안아준다. “반가워.”
1년간은 이렇게 매일 같이 데리러 다녔다. 중간에 육아 휴직을 한 내게, 하교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일은, 특권을 얻은 양 귀했고 뿌듯했다. 오전 시간을 나와 아이들을 위한 공부로 바삐 보내다가도 12시 30분에 맞춰 열 일 제치고 나갔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올해 쌍둥이는 2학년이 되었고 새 학기 한 주 정도만 예처럼 데리러 간 후 아이들에게 일렀다.
“행님들, 이제 학교 끝나면 너희 혼자 집으로 오는 거야.”
아이들은 대견하게도 씩씩하게 그리 다녔다. 집이 학교에서 5분 거리이고, 유일하게 건너야 하는 찻길인 학교 정문 앞은 늘 녹색 어르신들이 지켜주셨기에 안전에 대해 크게 걱정되는 것은 없었다. 다만 고백하건대 점점 더, 내 할 일 내 공부에 ‘고만큼’이라도 더 시간을 쓰고 싶은 욕심이 한자리 차지했어서였다는 게 못내 미안한 것이었다. “오늘부터요? 왜요?” 하고 섭섭한 기색을 보이던 도진이의 그날 아침 얼굴을, 지금도 이리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그때는 외면했었다는 게.
"엄마, 오늘 꼭 데리러 오세요."
아이의 말에, 오랜만에 하교 시간에 맞추어 도진이를 데리러 갔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는 어째서 다른 느낌일까. 왠지 더욱 애틋하고 기특하다. “반가워” 꼭 안아주는 엄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손을 잡고 철봉으로 이끈다.
“이것 봐요, 엄마.”
철봉 오래 매달리기, 매달린 채로 옆으로 옮겨가기 등 한껏 보여주더니, 다음에는 구름다리로 가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구름다리를 손으로 건너는 것까지 자랑한다. 지난번과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오~ 연습한 보람 있는데~”, “오~ 팔근육 장난 아닌데~” 하며 연신 추켜준다.
그렇게 철봉 자랑이 끝나고 아이는 모래놀이에 돌입했다. 아이와 함께 무심코 모래밭에 발을 들였다가 윽, 샌들 속으로 모래가 습격을 한다. 운동장에서 놀 게 분명한데 샌들을 신고 온 게 실수다. 오랜만이라고 감 떨어졌네. 에이 모르겠다. 아이 곁에 나도 주저앉았다.
한참 구덩이를 파더니 그 안의 촉촉한 흙을 모아 탑을 쌓는다. 찰기 없는 모래가 자꾸 으스러지는데도 작고 소복한 손은 부서지는 모래를 연방 모으고 눌러 점점 단단하게, 점점 높이 세워간다. 뭐든 단번에 되는 것이 없다. 하지만 안 되는 것도 없다.
누리호 발사가 연기되었다. 고흥까지 체험학습을 내고 간 아이들도 있다는데,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생중계로 지켜볼 기대에 찼던 아이들도 실망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로켓 발사가 쉽지 않다는 것을, 과학 연구의 어려움을,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오늘 아침, 다시 준비하여 완벽하게 성공한 누리호 발사 장면을 우리 가족은 보았다. 밥을 먹으며 다 함께 박수를 쳤다. 으스러지는 모래를 자꾸 그러모으고 힘껏 다지면서 비로소 탑이 완성된 것처럼, 결코 처음부터 완전할 수 없는 것을, 쉽지 않은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 ‘가는’ 것임을 아이들은 계속해서 알아갈 것이다.
아이들뿐이랴. 이 마흔의 엄마도 온통 부족함 투성이라 여전히 배우고 있는 걸. 발사에 실패 후 갈무리해 다음날 성공해 내는 누리호를 보며 또 울컥했는걸.
꾸준히 얕은 영어 공부하는 나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주변에 아무도 없이 아이와 둘만 있으면 영어로 스몰토크를 시도한다. 엄마를 판단하지 않는 아이들이니, 이들에게는 부끄럽지 않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막무가내 영어를 가장 잘 받아주는 도진이가 주 고객이다.
소심하게 주위를 둘러본 후 말을 건넨다.
"도진, I like watching you playing on the sand."
"......(씨익)"
"You made that sandcastle very well. You are so creative."
"Thanks."
"I really like that."
"...... I like you."
심쿵.
엄마에게 이런 달달한 말을 해주려고 데리러 오라고 했느냐.
“너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 네 인생에서 다시는 안 와.”
지금 이 시간도 한번 흘러가면 두 번 다시 내 인생에서 찾아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손웅정 -
어제 인사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그만하면 됐잖아요. 애들이 엄마 더 필요하대요? 이제 안 필요할 것 같은데.”
언어폭력에 가까운 말이다,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총알을 받고 있었다. 당당하지 못할 것도 없는데 인사팀과의 대면은 언제나 개운치 않다.
내가 필요해요. 지금 흘러가는, 두 번 다시 내게 오지 않을 이 시간. 아이들이 기다려주지 않아요. 너무 빨리 자라거든요. 육아 휴직이 젖먹이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에요. 지금 내가 간절히 필요해요. 내가.
아이가 원하면 기꺼이 데리러 가리. 너희들을 이렇게나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금 시간을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즐길 것이다. (이 아기자기함은 나의 휴직기간만큼이나 오래지 않을 거라는 걸 초5 딸을 보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