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앞에 있어 주세요!"
2학년 아들 쌍둥이가 샤워 독립에 들어갔다.
그간 엄마, 아빠가 씻겨주다가 올봄부터 스스로 씻어보기로 했고, 때가 되어서인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학교에서나 축구 학원에서도 올해 1학년 동생들이 들어오며 처음 형님으로 살게 된 기분이 싫지 않던 차에 엄마 아빠나 누나처럼 혼자 샤워를 하게 된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는 타월을 허리에 묶고 영화배우를 흉내 내보기도 한다.
다만 요구 사항이 있다. 엄마가 샤워하는 욕실 앞에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것.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동시에 공포의 세계에 입문했다. 어째서 초등학생들은 책이며 영상이며 무서운 이야기들을 그리 탐하는가. 하긴 나 역시 홍콩 할매 귀신이나 추리 소설을 위주로 섭렵했던 어린이로서 충분히 이해 가는 바이지만 말이다. '신비아파트 월화수목공포일' 같은 책을 빌려오거나 '알고 보면 이상한 이야기', '미해결 사건 파일' 같은 제목의 손바닥 만한 포켓북을 문구점에서 천 원에 사 온다. 슬쩍 봐도 허섭 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공포 책들에 폭 빠져 읽는 것은 대낮 한정이다. 밝은 낮동안의 포근함에서 마음 놓고 즐긴 공포 스토리가 어둠이 오면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저는 겁이 많거든요."하고 말하는 우리 집 2학년들은, 샤워는 혼자 가능해졌어도 어른이 문 앞에 있어주기를 주문한다.
두 아이가 차례로 샤워하는 동안 나는 욕실 앞을 지킨다. 처음에는 나의 주 업무는 그들의 샤워 독립을 응원하며 조언을 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금세 능숙해졌다. 그리하여 내 역할은 곧, 그저 거기 있기만 하면 되었다. 즉시 책을 준비하였다. 그럼으로써 매일의 독서 시간이 고정적으로 보장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지만 때론 하루를 보내면서 단 일분도 책을 들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 이럴 땐 식기세척기를 마다하고 굳이 굳이 직접 설거지하기를 선호하며, 설거지하는 동안 합법적으로 가지는 유튜브시간을 고수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뭐 책이야 합법적이지 못할 이유 없지만, 엄마가 많고 많은 일을 하는 와중에 '나 지금 '공적으로' 여기 있어야 해'. 있어야 하는 동안 책을 읽는 시간으로 정한 거야.
샤워할 시간-통상 저녁시간- 즈음되면 넋이라도 있고 없게 난장판이 된 거실 바닥에 흐린 눈 하고 싶고, 우선순위에서 앞섰던 다른 일들을 잠시 두고 싶은 심정이다. 홀로서기에 이제 한 발 내민, 아직은 귀여운 겁쟁이 아이들이 엄마에게 귀한 틈을 제공한 셈이다. 짧은 시간, 좁은 공간이 주는 최고의 집중력을 그들 덕에 선물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틈에 나는 꽤 많은 양의 책장을 넘기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영감을 받는다.(아무래도 책은 구석탱이에서 읽어야 제맛인가 보다)
어떻게든 '내 시간'을 만들어 숨통을 틔어야 살 수 있는 나라는 걸 잘 안다. 그러니 요만한 사소한 기회도 지독하게 me time으로 만들 궁리를 하고 있지. 그런 자신을 알아채면 피식 웃음 한 번 준다.
'어이구.'
'잘하네.'
세 아이를 키우며, 십여 년 육아에서도, 특히 요즘처럼 종일 붙어있는 방학중이더라도, 하여간 어떤 상황에서도 요령은 생겼다. 아이들이 흥얼거리며 씻고 있는 욕실 앞, 내 엉덩이 붙일 수 있는 이 소소한 공간에서 소중한 책과 최고의 힐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지금 쓰는 다이어리 끝에 '올해의 발견'으로 기록되지 싶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