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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Aug 30. 2023

편의점 낙서인에게


오늘은 다섯 명이 '따로 또 같이' 일요일을 보내게 되었다. 쌍둥이 아들들은 아빠와 함께 오늘 폐장하는 야외물놀이장에서 올여름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기로, 딸아이와 나는 도서관에서 죽치고 아니, 책에 파묻혀 보내기로 했다. 우리 둘을 도서관 근처에 떨구고 남자 셋은 떠났다.


아침을 느지감치 먹은 사정 따위 아랑곳 않는 십 대 소녀가 차에서 내리자마다 배가 고프다 한다.

"벌써? 엄마는 배가 안 꺼졌는데..."

하지만 내 말은 혼잣말이 되었다.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혼잣말이 된 말과, 혼잣말의 탈을 쓰고 다분히 의도를 내보이는 말.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닮았다.

그 와중에 소녀의 취향이 귀여워 웃음이 나온다.

"그래, 어떤 얼큰한 국물?"

언제나처럼 넘어온 엄마를 보고 아이는 짐짓 고심한다.

"김치찌개, 지만 지금은 부담스럽고... 컵라면?"

어쩜. 누굴 닮아서 '답정너'니. 누구긴 누구. 문박사는 어린 버전의 나를 보며 웃지 않을 수 없다.

"가자, 편의점!"





내가 고른 혜자도시락, 아이가 픽한 참깨컵라면과 바나나우유, 그리고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 합의하에 고른 조화로운 구성에 퍽 흡족해하며 모녀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라면을 뜯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뚜껑 위에 젓가락을 올려놓고 시작되는 3분은 라면이 알맞게 익기를 기다리는(어차피 기성품인데 이 이상을 기대함을 인정한다) 경건한 시간인 한편, 한참 부산스러웠던 식전 준비를 마치고 갑자기 여유로워지는 잠시이기도 하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창 밖의 커다란 산과 그 산을 담고 흐르는 남한강 줄기, 자연과 편의점 건물 사이에 난 차도와 인도, 일요일 낮 나른한 시간대의 분주한 관광객들. 이런 풍경들을 한가로이 구경한다. 그러다 우리 자리 뒤의 벽에 시선이 멈추었다.


난삽하고, 자유분방하고, 귀엽고, 솔직하고, 쾌락적인 흔한 낙서들 속에 어쩐지 눈에 띄는 낙서가 있었다.

커다란 고래 그림이 있고 주변으로 문장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는데, 그림에도 필체가 있다고 할까, 그림과 글씨가 한 사람의 여러 작품(!)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다 익은 라면과 잘 어울리는 도시락을 즐기며 우리 모녀는 눈으로 여전히 그 낙서를 좇으며 토론하기 시작했다.

"어른 글씨 같기도 하고." 내가 유추했다.

"남자일 것 같아." 아이도 보탠다.

"그래?"

"안경을 썼을 것 같고."


아이의 상상을 내가 받아, 이토록 진지한 낙서를 하는 안경 쓴 남자를 머리에 그려본다.


그는(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로 통칭한다) 몸만 달랑일 것 같지 않다. 노트북 가방이나 크로스백도 아니고 어쩐지 백팩을 멘 차림일 것 같다. 창문과 벽이 만나는 구석자리(지금 우리 자리)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우리처럼 도시락이나 컵라면 같은 간단한 식사로 끼니를 챙기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커피 한 잔이나, 아 그렇지 낮시간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어쩌면 맥주 한 캔을 놓고 앉았을 수 있겠다.(안주는 없는 게 어울린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에 한동안 시선을 준다.

동행은 없었을 것 같다. 주변의 낙서들, 이를테면 '사마야 사랑해,  견우❤️직녀, 절세미녀 문박사 왔다감, 단양 여행 기념! 우리 우정 영원하리' 같은 낙서들은 옆에 누군가(들)와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놀이 삼아하는 장면이 자연스럽다. 반면 그의 낙서는 동행과 함께인 중에 행한 거라기엔 다소 진지하고 긴 감이 있다. 하지만 동행과 함께인 쪽도 상상해보고 싶어 진다. 나와 달리 그는 타인을 그리 의식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누구보다 '그' 쪽에서 아무렇지 않았을 수 있다. 혹은 그 동행이라는 사람(들)이 너무도 편한 사이여서 그런 종류의 낙서를 그것도 한참을, 그러거나 말거나 관여하지 않는 사이일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있다. 같이 있는 게 공기와 같아서 아무 말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사이.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품어주는. 오랜 친구 둘이 갑자기 그립다.)





그래봐야 낙서인데 뭐가 어디가 어떻게 자꾸 진지하다는 건지 들여다본다.



여러 군데 적은 문구들 중 많은 부분이 흐려져 해독이 어렵지만, 고래 위에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있는 문구는 이랬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것인가를 웨더맨이 없어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대한민국 만세. 2016.11.19'

이거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생각하며 검색해 보니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밥딜런의 <Subterranean Homesick Blues> 가사였다. "You don’t need a weatherman to know which way the wind blows." 이를 2016년 11월 18일에 손석희 앵커가 뉴스를 마무리하는 멘트로 인용하여 유명해졌던 일도 여러 관련 기사를 보니 기억이 났다. 벽에 기록된 낙서일(!)은 그 뉴스가 방송된 다음날이었다. 당시 박근혜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가 뜨거웠는데 한나라당 김진태 의원의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발언을 손석희 앵커가 뉴스에서 전하며 그에 대한(반한) 묵직한 메시지로 이 문구를 인용한 것이었다. 나 또한 당시 촛불에 마음을 보태고 있던 국민 중 한 사람이었으니 벽의 문구를 익숙하게 느꼈던 것도 이 뉴스 때문이었겠다.


처음 슬쩍 보았을 때는 무엇보다 말미에 '대한민국 만세'를 덧붙인 것에 뜨악했다. 앞의 진지함도 모자라, 진지함의 화룡정점이라 할까. '진지충'이라는 신조어로 진지함을 비꼬는 요즘 세태에서 볼 때 '대놓고 이런다고?' 란 꼬리가 이어질 문구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짜를 보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많은 국민이 트라우마를 겪은 그 일, 그 이후. 참혹하고 슬프고 허망하고 그래서 뜨겁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터널을 지나온 모두라면 '대한민국 만세'의 절절함이 7년 전 11월 19일에는 당연하고 마땅했음을 공감할 것이었다.






조금 떨어진 옆 벽면에 같은 필체의 다른 낙서가 보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 중


문학 중에서도 시를 특히 좋아한다 말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교과서에 실린 시 중 이를 가장 좋아한다. 아니 유독 이 시는 '좋아한다' 보다는 '아낀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고귀한 이 시를 다소 그렇지 못한 벽에서 만났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난 의외성 때문인지 더 반갑다.


시에 눈을 고정한 채로 딸아이에게 묻는다.

"이 시 알아? 본 적 있어?"

"음... 아뇨. 누가 쓴 건데요?"

"윤동주 시인."

"아, 윤동주 시인은 알아요."


초5도 아는 시인 윤동주. 중학교 올라가면 교과서에서 볼 거야. 그러나 그저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하고 분석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곧지. 일제 강점기에 한글로 쓰인 시인데도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대.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남을 험담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대.

우리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시를 7년 전의 그가 편의점 벽에 굳이 남겨준 덕에, 미래까지 품고 기억할 아이와 나누고 있었다.






부유하던 시선이 필연적으로 머무는 곳은 정면의 벽이다. 벽에 있는 화려한 낙서를 본다. 낙서가 펼쳐진 범위만큼 시야는 확장된다. 처음 한 눈에는 어쩐지 한심하게 보이는 게 낙서다.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공간에 갇힌 상황에서 하릴없이 하나하나씩 뜯어보게 되면서 속으로 'ㅋㅋ' 하는 말풍선을 그리게 되는 게 낙서고 말이다. 그런 다음 빈자리를 찾는다. 내 자리를. 뭐 거의 본능이다. 그리고 나는 써볼까, 안의 장난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혹은 다른 낙서를 보는 동안 이미 준비된 작품(!)이 있던지 말이다.

언제든 수시로 꺼내 있게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 둔 펜을 주섬주섬 꺼내는 동작을 상상한다.

그는 어느 쪽이었을까.

응? 그러고 보니 빈자리를 찾아 헤맸다고 하기엔 꽤 중앙이다? 전체 벽면에서 제법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서는 쓰고 그렸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던 흰 벽에 처음으로 펜을 댄 사람일 수도 있겠는데.

낙서의... 선구자?!


낙서 같은 행위에도 '선구자'라고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뜻을 찾아본다.


선구자()는 '앞서 달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행렬에서 맨 앞에 선 사람, 또는 어떤 일이나 사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을 뜻한다. 주로 숭고한 목표나 진화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 나무위키


긍정적인 의미에 쓰인단다. 찜찜한 이유가 있었다. 나 감 있네? 이번엔 그럼 낙서의 뜻도 짚고 간다.


 낙서(落書) 2.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 데나 함부로 씀. 또는 그 글자나 그림.

- 네이버 국어사전


아무 데나, 함부로 쓴다는 뜻의 행위에 선구자를 붙일 수는 없겠다. 그럼 이렇게 하련다.


'(첫 낙서라면) 아무것도 없는 눈밭에 발자국을 낸 선구자,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나머지들의 자유로운 표현이끈 선구자'(이건 편의점 사장님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첫 낙서가 아니라면) 가볍고도 가벼운, 낙서다운 낙서가 가득한 와중에 주변에 개의치 않고 사회 메시지를 전하는 선구자'

'정치와 사회문제와 문학을 융합하는 선구자'





또. 또. 의미 부여하는 버릇 나왔다. 점점 가관이다. 하다보니 퍽 유치한 광고 카피 같아졌다.

내가 요러고 있는 걸 보니 세상 진지한 저 낙서가 무척 인상적인 모양이다. 독서실 책상이든, 관광지든, 화장실이든, 어디서든 흔히 보는 그것과는 다른 류가 신기했던 것 같다. 이질감과 의외성은 처음은 불편하지만 그게 매력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조금 오글거려도 좋으니 매력적인 이질감과 외성을 여기저기 끄적여 남겨주길, 낙서인(!)에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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