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과 월요일 공휴일까지 기분 좋게 빨간 글씨로 이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2박 3일 연휴를 보낼 계획을 한 게 한 달 전이었다. 날 좋은 가을에 서울 구경할 생각에 아이들은 들떠 있었고 나 역시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덜 힘들며, 더 신나게 보낼 수 있을지 연구하며 틈틈이 일정을 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일단 선생님의 감사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으니,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행사 중 연주가 있는 날은 연휴의 마지막 날인 월요일. 마음 같아서는 연휴고 뭐고 내내 연습에 몰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휴는 길었고, 여행을 기대해 온 아이들이 느끼는 실망은 엄마를 응원하는 마음과는 별개다. 그래도 연주 전날만큼은 마지막으로 선생님과 맞춰봐야 했고 나 역시 준비가 필요했으니, 결국 토요일 하루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아이들과 엄마가 서로 한 발씩 양보한 결과였다.
대폭 축소된 우리의 일정. 목적지는 단 한 곳으로 잡았다.
육아라는 것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특히 아이들과 여행을 한다는 것은 포기를 배우는 일의 연속이다. 계획에서부터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차피 P 성향인 나는 일정을 시간대별로 엑셀에 착착 정리하여 가이드 수준으로 여행 계획하는 친구를 보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긴 하다. 그럼에도, 나의 성향을 전제로 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여행이라면 거기서도 조금 더 내려놓아야 한다. 빡빡한 계획은 금물이다. 하루에 코스 하나, 백번 양보해서 플러스 하나 정도 더 마음에 담아둘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여분이다.
하나는 필수~ 여분은 선택~ 애들이 뛰는 대로 가면 돼~
그리하여 이번 서울로의 당일치기 여행지로 정한 곳은, 광화문이다. 여러 날 둘러봐도 좋을 만한 곳이 광화문인데, 다양한 박물관과 경복궁 한복 행차는 다음으로 기약하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첫 목적지로 했다.
우리가 유일하게 준비한 것은 주말 기차 왕복 티켓뿐이다. 기차 안에서 '목적지 근처 맛집'을 검색하며 대강 훑은 것은 다만 서울 구경 갈 때면 으레 하는 습관 같은 것이기도 하거니와 '만약'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청량리에서 지하철을 차고 광화문에 도착했다. 근엄한 동시에 백성들을(관광객들을) 굽어보는 자애로운 자태의 세종대왕 동상에 감탄한 우리 일부가 있었고, 사진 찍기를 마치자마자 '배고파요'을 입에 달기 시작한 아홉 살 두 아이가 있었다.
입이 터졌으니 점점 짧은 간격으로 밥타령에 들어갈 것을 우리 부부는 안다.
일단 식당가 골목으로 향한다. 빠르게 훑으며 적당한 식당이 있는지 살핀다. 적당한 식당이라 함은 세 아이의 다른 취향에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서 엄마아빠의 마음으로는 영양적으로도 안심할 만한 메뉴가 있는 식당이다. 첫째는 한식파다. 국밥이나 얼큰한 국물과 밥의 조화 같은 것을 좋아한다. 밖에 나오면 유독 더 찾는다. 쌍둥이 아들 둘도 개취가 있다. 둘째는 분식파고 셋째는 면 귀신이다. 각자의 취향을 조금 접고 양보를 할 적에는 합의가 잘 되기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쉽지 않다. 결국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식당 내부를 둘러보며 메뉴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좀 짠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서울까지 와서 동네와 다름없는 중국집을 오다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니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훅 올라오는 순간이 더러 있다. 내 안색에 눈치챈 사마씨가 위로한다.
"맛집은 서울 혼자 올 때 가~."
아닌 게 아니라 나 혼자 놀러 다닐 때는 맛집을 검색해 다니기도 한다. 원체 줄 서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대기가 너무 긴 식당은 애초에 거르기는 하지만 쿵짝이 잘 맞는 딸과도 '어느 정도의' 맛집은 가능하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아들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얘네도 크면 배고픔도 참고 많이 걷더라도 근사한 식당 좀 찾아갈 수 있는 건지.)
그러는 사이 잔뜩 나온 메뉴들을 보고 아이들이 반색한다. 밥류든 면류든 탕수육이든 고루고루 시켜 맛나게 먹는 걸 보니 철없이 속상했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입가에, 옷에, 잔뜩 묻히고 튀겨가며, 그래 그렇게 마음껏 먹으렴. 엄마도 덩달아 좋다. 배부르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몇 시간을 알차게 보고 체험하며 즐긴 후 나왔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출출해진 우리는 간식거리를 파는 거리로 향했다. 역시 메뉴가 갈린다. 일단 첫째는 버블티. 마침 길거리 음료 가게가 보인다. 거기서 버블티 주문하고. 둘째는 달고나라테를 이야기한다. '달고나라테는 이**인데'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는데 딱 그 가게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마침 나도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당겼던지라 바로 들어가 달고나라테와 함께 셋째의 메뉴까지 주문 완료.
낯선 동네의 익숙한 매장, 익숙한 키오스크, 익숙한 메뉴의 익숙한 맛. 그만 웃음이 터지는 것이다. 커피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다양하고 많고 많은 커피숍이 거리마다 즐비한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 집 앞에도 있는 이** 에 하필 들어온 우리가 우스꽝스럽다. 그렇다고 익숙함으로 애써 애써 굳이 굳이 찾아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시골쥐는 의아하며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왠지 억울하다.
음료만으로는 아쉬운 시간대다. 버거 매장이 기다린 듯 나타났다. 워후 드디어! '유명하지만 우리 동네에 없는' 메뉴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아는, 별 것 아닌 일로 깔깔댔다.
익숙한 것과, 유명하지만 새로운 것들을 달랑달랑 들고 광화문 거리로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세 가지'로 우리 가족 모두가 똑같이 꼽은 것이 바로 앞으로의이 공간, 이 시간이었다. 역시 여행은 목적지에서보다 길 위에 아무렇게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