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위를 향해 가는 물줄기를 쏘아 올려 무지개 모양으로 떨어지게 만든 바닥 분수 사이를 사람들이 지난다. 듣기 좋은 정도로 잔잔하게 졸졸 혹은 쏴 하는 물소리와, 신나서 까르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물이 튈까 살짝 웅크린 채 조심조심 지나면서도 표정에는 자못 설렘을 숨지지 못한 귀여운 어른들까지, 모두 뒤섞여 도심의 주말 오후를 실감하게 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물줄기를 손으로 막아 주변으로 마구 튀게 하는 등의, 호기심이 넘쳐 끝내는 '짓궂'고야 마는 초등학생들의 장난에 주의를 주며 우리는 벤치 대용 층계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 분수를 비롯해서 그 주변이 온통 초록초록했다. 정성 들여 조성된 정원 같다, 생각하는데 문득 익숙한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바닥분수 옆 한쪽에 근사한 피아노가 있었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눈에 반해버렸다.
피아노 앞에는 작고 예쁜 안내 팻말이 있었다.
'피아노 버스킹. 자유롭게 연주하고 자유롭게 들으세요.'
아마도 상시로 비치된 것은 아니니라. 서울에도 몇몇 곳에 있는(있다고 알려진) 길거리 피아노는 통상 업라이트 피아노이다. 안내 팻말과 함께 고급 그랜드 피아노가 설치된 것은 주최가 있는 이벤트일 것이다.
내가 사는 작은 동네에는 버스킹 문화가 흔하지 않다(읎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많이 보긴 했지만 주로 노래나 춤이 아니면 기타 같은 악기가 대부분이었고, 피아노라 하면 전자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본 게 전부였다. 길거리 피아노의 존재도 관련 동호회 카페나, 알고리즘으로 뜨는 유튜브에서나 '감상'하는 문물일 뿐이다. 그러니 광화문거리 한복판에 놓인 '무려' 그랜드 피아노에 엄마 시골쥐가 뿅 간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근사한 피아노 버스킹(=근사한 피아노, 피아노 버스킹) 현장을 우연히 만난 것 말고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이 또 있었다.
나의 애틋한 시선을 보았는지 사마씨가 던졌다.
"자기도 쳐 봐."
피아노를 배우고 있고, 이틀 후엔 비록 작은 행사지만 인생 첫 연주를 하기로 되어있는 아내이니, 남편으로서 시의적절하고도 합리적인 부추김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예행연습 삼아 한 번 쳐볼 만도 했다. 좋은 기회였다. 연주 준비가 얼추 마무리되어 있었으니 스스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마씨의 말에 '그럼 나도 한 번...' 마음먹으려는 때였다.
웬일? 엉덩이를 떼지도 않았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물론 이틀 후 연주 때 암보를 해서 치는 것은 아니다. 악보를 놓고 치기에 완벽하게 외우지 않아도 되긴 했다. 그러나 많은 연습으로 거의 외우게 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는 백지 악보만 펼쳐질 뿐이었다. 사마씨에겐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귀로는 다른 이들의 연주를 감상하며 안으로는 상념에 빠졌다.
무대 공포증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건가. 사람들 앞에 서면 머리부터 하얘지는 거, 전형적인 내 증상인데.
이럴 기회가 오랫동안 없었던 바람에 아예 잊고 살았다. 그저 잊고 있었던 것인데 없어졌다고 착각했다. 이걸 깨닫자 슬금 두려움이 비집고 올라왔다. 다수 앞에서의 연주, 가능한 것일까. 나 잘할 수 있을까.
나의 상념을 비웃듯 눈앞에서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버스킹 피아노는 쉴 틈이 없었다. 놀랍게도 오픈된 공간, 길 위 피아노를 연주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소심하고 긴장이 많은 나로서는 버스킹 참여자(!)들이 줄을 선 장면이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으며, 그들의 용기, 혹은 용기씩이나 필요 없음이 깊이 부러워졌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피아노를 사랑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의미일테니 그건 그것대로 뿌듯하기도 했다.
어쨌든 내 기준에서의 '용자'들은 꽤나 다양한 모습이었다. 우리처럼 나들이 나온 듯한 가족의 어린이 연주자도 많았고 그 곁엔 자녀의 연주를 흐뭇함 가득한 얼굴로 촬영하는 부모가 있었다.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십 대 남학생들이 차례로 연주하더니 쿨하게 퇴장하며 서로의 등을 치고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는 모습은 흡사 청소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싱그러웠다. 남녀 할 것 없이 성인 연주자들도 제법 있었는데 하나같이 프로급 연주였다.
다양한 연주자들만큼이나 다양한 연주곡 덕분으로 나는 잠시의 상념에서 벗어나 어느샌가부터 감상 모드로 스며들고 있었다. 특히, 피아노 곁에서 내내 어깨춤추던 아저씨의 공이 컸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어느 지역의 무대에서나 맨 앞에서 춤추던 관객들을 연상시키는 그 아저씨는 빨간 잠바에 배낭을 멘 차림이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몸을 맡긴 듯 덩실덩실 움직였다. 어느 곡이 연주되든지 관계없이 같은 춤을 추는 듯하면서도 곡마다의 박자와 리듬에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전혀 거슬리지 않는 점이 신기했다. 술 한 잔 걸쳤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또 멈춰 서서 연주자의 연주를 한참 집중해서 바라보기도 했다. 술주정이든 아니든 뭣이 중헌디. (폐만 안 끼친다면.)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그의 몸짓이 진정 음악을 즐기는 모습 아닐까. 긴장을 조금 내려놓고 나도 저런 모습이고 싶다. 어쩌면 나는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향장치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 덕에 우리가, 사람들이 듣는 소리는 오롯이 피아노 자체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주변의, 거리의 소리와 섞여 오히려 듣기 편안했다. 춤추는 아저씨처럼 한 잔 걸친 듯이 세상이 보였다.
북악산 너머가 주황색으로 물들 때까지 우리는 도란도란 간식을 나눠 먹으며, 서울에서의 늦은 오후를 그렇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