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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Oct 14. 2023

앞치마 차림으로 요리보다 설레는 일을 한다

토요일 아침 8시 반.

집안이 조용하다.


사마씨는 일이 있어 진작 나갔고, 나는 조용한 이 시간을 놓지 않기 위해 책을 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온다, 온다, 영감님이 온다. 밑줄을 그으려다 마음을 바꾼다. 내 책상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서둘러 준비물을 챙겨 다시 나온다. 반대말 같지만 정말 그렇게 했다. 조심조심 재빨리. 밑줄 가지고는 부족한 영감님을 붙잡으려 달떠 적어 내려간다.






"엄마 요즘 깜빡깜빡하네요."

엊그젠가 딸아이에게 들은 말이기도 하나, 나 역시도 감지하고 있는 바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깜빡한다. 하루에도, 순간순간에도 아주 많은 생각이 내게 머무르지 못하고 그저 스쳐만 가는 느낌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할 일과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잠시라도 내게 담겨있기에 혹은 나를 일깨우기에 다른 수많은 할 일과 생각들이 밀려오고, 밀치고 들어오고, 그리하여 바삐 자리를 내어줘야 하고, 그러다 보니 아예 쓱 지나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적는다. 더 자주.

늘 쓰는 다이어리에는 플래너처럼 그날 할 일부터 죽 적고 완료했을 때는 체크를 해본다. 계획에 없었지만 그날 해냈거나 일어난 일은 다른 색깔로 기록한다. (좋아하는 다이어리나 수첩에 좋아하는 펜으로 나에 맞게 연구하며 기록하는 일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이기도 하다. 문구 덕후가 성실하게 문구를 들이는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또 마련한다.)

다섯 가족에 대해 자잘하게 챙겨야 할 일들은 어쩜 그리도 늘 있는 것인지! 고백하건대 워낙 잘 놓치는 편이다. 이런 자신을 알기에 반짝 기억날 때마다 얼른 달려가 달력에라도 표시하려고 한다.

그 밖에도 일상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귀하다 싶을 때는 늘 가까이에 두는 수첩에 적고, 운동 중이거나 이동 중일 때는 휴대폰의 메모장을 활용한다.

책을 읽으면서는 가슴을 울리거나 때리는 페이지에 부쩍 오래 머물게 되었다. 줄만 긋고 넘어갈 때도 있지만 점점 더, 넓은 포스트잇에 깨알같이 적어 붙이며 작가와 글과 교감하며 읽는 일이 잦아졌고, 그래서 느리게, 충만하게 읽는 책이 좋아졌다.


이 메모나 짧은 기록들을 백 퍼센트 다 활용한다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충분하다.

바로 지금 내게 필요한 고마운 조언, 나의 진심, 오늘 그리는 나의 꿈, 현재 내게 중요한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적다 보면 이 행위만으로도 나를 돌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시선이 아니라, 직장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오롯이 내 안을 유하게, 단단하게 채우고 있다는 위로가 된다.






주말만큼은 푸지게 자는 맛이 있어야지, 그게 인생이지, 라는 신념이 있었다. 조금씩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나이 드니 변하나벼? 

푸지게 자는 맛도 여전히 좋다. 하지만 못지않게 좋은 맛'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니, 먹지 않고 피부에 양보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모처럼 일찍 아침식사 준비를 마쳐놓고, 아이들이 깨서 나올 때까지 me time을 보내고 있다.

앞치마를 두른 채로 식탁 앞에 앉은 이 주부는, 원두를 갈아 내린 커피 한 잔을 놓고, 책을 폈다. 그러다 금세 그분이 오는 바람에 이렇게 또 끄적이고 있다.


'아이들아. 주말에는 푸우우우욱 자렴. 그래야 쑥쑥 크지.'


조용하고 조마조마하며 편안한, 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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