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테스터로 두 줄을 확인하고도 ‘지금 가봐야 초음파에 안 보일 수도 있어.’ 짐짓 여유를 부리며 한 달 만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소름이 돋게 찬 겔을 배에 펴 바르고 기계로 배를 찬찬히 문질렀다. 춥다, 생각하는데 흑백 화면에 뭔가가 또렷이 잡히자 의사가 동작을 멈추었다.
어라. 땅콩이 두 개다?
“쌍둥이네요.”
양쪽 집안에 유전인자가 있다든가 하는 힌트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온 쌍둥이라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었을 뿐이다.
아이 하나만 키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기왕이면 복작복작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고 바쁘셨다.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필연인가 보다). 혈액형별 성격 이런 걸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네 명은 B형이다. 넷 다 그냥 b형 말고 대문자 B일 거야, 생각했다(맹신자인가 보다). 독립적이고 각자 터치 안 하고 자-알 산다. 비꼬는 건 아니다. 나 또한 구성원 셋에 뒤지지 않는 대문자 B이므로.
그런 성향인 것에 대해 대개 불만은 없었지만, 안 그렇기도 했다.
가족이 많아 지지고 볶고 하는 집 보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우리 집에는 그런 냄새는 잘 안 났다. 뭐, 풍기긴 하는데 무뎌졌을 수 있겠지만. 내가 꾸리게 될 내 집에서는 그 냄새가 ‘진동’하기를 바랐다.
4년 연애 후 결혼했다. 테스터를 십수 개를 쓴 끝에 두 줄을 확인했고 산부인과로 직행했다. 들떠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이 안 되니 어서 뺨을 때려주시오, 확답을 내어놓으시오, 싶었다. 그렇게 조급했고, 달걀을 손에 쥔 듯 조심스러웠다.
세상에나. 말해 무엇하리. 너무나 이쁜 아이.
아이가 이리 이쁜 줄 전엔 몰랐다.
아이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내미는 아기 사진을 볼 때나 아이를 대할 때면 힘써 이뻐해야 했다. 아이라서 우러나 이뻐하는 마음은 없었다. 사람에 대한 예의, 그랬던 것 같다.
20대 중반쯤 혼자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관객은 저쪽에 한 팀 그리고 나뿐이었다. 네댓 살 된 아이가 있네. 이 영화의 관람가가...?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상영이 시작되면서부터 극장 통로를 우다다다 큰소리 내며 뛰어다녔다. 러닝 타임 내내.
처음에는 참았다.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달리, 영화를 무려 만끽하고 있는 부모를 보니 점점 꼭지가 돌았다. 출동. ‘나도 내 돈 내 시간 써서 온 건데 두 시간을 날렸다’고 말했다. 아빠인 듯한 남자는 ‘어쩌라고’ 하며 되려 따졌고, 엄마인 듯한 여자가 남자를 말리고 내게 사과하는 시늉을 하여 일단락되었다.
사진출처 : 픽사 베이
첫 아이를 키우면서도, 순식간에 두 아이가 추가된 후에도 이 기억은 문득문득 찾아왔다. 과거 한순간에 불과한 에피소드치고는 너무 자주잖아, 생각했다.
괴로웠다. 왜냐하면, 부끄러웠으니까.
그 장면 속의 무지막지하게 이기적인 나를 마주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밀쳐내고 등졌다. 자꾸 나를 두드리니까 ‘대체 뭔데!’ 짜증 내면서 조금씩 방향을 틀었고, 언제부터인지는 스크린을 통하듯 한 발짝 떨어져서이긴 하지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사이 엄마가 되었기에 낼 수 있는 용기.
공중도덕 지키기, 민폐 끼치지 않기. 내 삶의 철칙이다. 이러하니 그 부모의 행동은 여전히 가당치 않다.
다만, 이제는 콧김 내뿜으며 직진하지는 않는다.
'이유가 있겠지. 어린이 영화도 아닌 것을 여복하면 아이 데리고 보러 왔을까. 여복하면.'
관심 있을 리 없는 저기 저 거대한 스크린에 압도되지 않고 어떻게든 놀잇거리를 찾아 노는 아이도 보인다. '아이는 아이구나. 창의적이고 호기심 많은 건강한 아이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흔한 명제는 어느 경우 참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키우려면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화가 나은 방향으로인 것 같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대학 진학으로 시골에서 상경할 때 엄마는 경제적 문제와 딸내미 치안 걱정을 이유로 서울에 있는 이모네 집에서 한동안 살게 했다. 자라면서 외가 친척들과 잦은 교류가 없던 터라 안 그래도 어색한데 그 집에는 꼬맹이 남매가 있었다. 여덟 살 남자아이, 다섯 살 여자아이.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그 애들의 말과 행동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랬다.
우리 집 맹구들이 이제 딱 고만하다.
역시나 부끄러운 그때를 생각하면, 아침에 내 방에 습격하여 이불속으로 쏙 들어와 비비던 어린 동생들의 이쁨을 알아채고 많이 웃어줄 걸, 반짝이는 그 애들 눈을 좀 맞추어 줄 걸, 미안해진다.
뻣뻣하고 어설펐던 누나, 언니 말고.
떡국 먹고 후루룩 나이만 먹은 세월은 아니었는가 보다.
생각할수록, 아이가 이쁜 줄 모르는 인간이 다복한 가정을 그리다니. 진짜 웃기고 앉았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는데, ‘이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 한번 없었다. 아주 뻔뻔하기가 그지없다.
사진출처 : 픽사 베이
의아하긴 했다. 신이 어쩌려고 나 같은 인간에게 세 아이나 보내주었을까.
세 아이와 함께 헤매며 부딪치며 자라며, 신의 '큰 그림'에 대해 슬슬 느낌이 온다. 팩폭을 당한 것처럼 민망한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