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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Dec 10. 2022

초고속열차에서 떠올린 것



“우와, 엄마. 과자 자판기도 있다! 과자 사주세요!”


여덟 살 인생에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한양 구경 가는 우리집 시골쥐들. 승객들이 드나들며 자동문이 열리자 자동판매기를 발견하고 신이 난 얼굴로 엄마를 본다.

    

과자 자판기. 나는 처음 보는 기계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생경하다.

‘쏘이 쟌스 쟝니 옌진 비러 치라~’

대만 드라마 『상견니』에서 카세트테이프 속 노래를 듣고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 황위시안처럼, 아이들의 말에 과자 자판기로 이끌린 시선이 어릴 적 한 장면으로 오로롱 데려간다.






어릴 때 종종 기차를 탔다. 어디를 갔었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 같은 것은 희미하다. 오래된 일을 기억할 때 늘 그렇듯 생생하게 남는 것은 그때 분위기와 나의 느낌.


기차를 탄다는 것은 그를 향한 설렘이었다. 처음 만남은 기억할 수 없지만 어린 나는 한 번의 경험으로 습득했을 것이다. 그의 의미를. 설렐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진출처 : 픽사 베이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는다.

출발의 긴장이 가라앉고 차창 밖 풍경이 지루해질 즈음부터 시선이 출입구를 향한다.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기차 끝에서 끝까지 몇 칸인지, 찬찬한 걸음일 때 우리가 탄 칸까지 얼마나 걸릴지 가늠해보면서도 눈은 출입문에 고정이다.


앗. 드디어. 우리 칸의 문이 열린다. 후광을 대동한 그의 등장.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배운 어린 나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지만, 분주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엄마 옷깃을 당긴다.

 “엄마 엄마, 왔다 왔다!”     






간식 수레 아저씨.

감색 제복 차림의 그는 수레를 밀며 아주 천천히 통로를 행차한다.  가까워지수레에는 온갖 먹거리가 다 있었으니, 음료수, 맥주, 삶은 달걀은 기본이요, 귤에 김밥도 있고 오징어, 쥐포 그리고 과자도 종류별로 있었다. 없는 게 없는 수레였다.     


오빠와 나의 픽은 늘 프랑크 소시지였다. 촌놈들이 간식 수레에서 프랑크 소시지를 집어 드는 것은 기차여행에서만 누리는 호사였다.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기분 째졌다. 어린이에게 쉽지 않은 장거리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요, 여정이 순조로웠던 비결이기도 했다.

엄마는 매번 흔쾌히,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지갑을 꺼냈다.


훌쩍 자란 나는 수능을 치르고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기차로 고향과 서울을 오갔다. 늘 동행한 고향 친구와 나는 일관성 있게도 버터구이 오징어만 그렇게 먹었다. 버터맛이 물리면 고추장을 찍어 먹는 매콤 짭짤한 오징어로도 유연하게 번갈아가며.     




이후 사회인이 되어 기차를 탈 무렵에는 이미 수레의 품목이 매우 간소화되어 있었다.  판매원 아저씨가 즉석에서 타 주는 천 원짜리 커피가 있었는데 나는 종종 그걸 즐겼다.


수레가 지나갈 때는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세워야 했다. 다른 승객들에게 너무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그러나 아저씨가 나의 간절함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적당히 큰 소리로.       

“커피 한 잔 주세요.” 하면 판매원 아저씨가 수레를 세우고 커피를 타 주었다. 믹스커피를 꺼내 익숙하고 시원하게 탁탁 털어 종이컵에 붓는다. 보온병의 뜨거운 물이 종이컵에 떨어지는 소리가 담백하다. 무심한 듯하지만 대충은 아닌 손놀림으로 휘휘 저어 건넨다.      

사진출처 : 픽사 베이



강약 중강 약, 덩기덕 쿵더러러, 하는 특유의 리드미컬한 기차 소리를 ASMR로 하고, 자동차로 도로를 달릴 때보다 왠지 모르게 더 낭만적인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믹스커피를 홀짝이자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양이 적다. 빨리 식네. 이런 깨는 생각을 잠깐씩 하며 과한 감상에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내가 탄 제천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고작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기차에 타고 있다. 아마 빨라지겠지.

간식 판매원 아저씨가 찬찬한 걸음으로 수레를 밀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닌다면 채 몇 바퀴 돌기 전에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다. 온 세상을 휩쓴 신종 전염병으로 차내에서 음식 섭취는커녕 마스크도 벗을 수 없게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이유로, 자동판매기 대신 간식 수레가 다시 등장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차 타는 일이 계속 좋을 것 같다. 


우주로 향하는 꿈을 꾸는 내 아이들 옆에서 나는, 종종 귀를 멍멍하게 하는 초고속 열차를 타고 지금은 있지도 않은 카세트테이프를 기꺼이 돌려 이따금 그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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