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들 Dec 27. 2022

짝사랑인지 외사랑인지 뭣이 중헌디

혼자 좋아했다 이거여

또래 여자동료들과 술자리에서 수다를 떨다 보니 꽤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문박사는 어땠어? 연애 얘기 좀 해봐아~"

"나? 사마씨가 처음 사귄 사람. 연애 얘기, 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

"뭐어어? 사마씨가 처으음? 대체 뭐 하고 살았어?!"


사마씨는 남편이다.

사내연애 4년 끝에 결혼한 사내부부. 이들이 궁금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마씨와의 연애가 아닌' 과거 얘기렸다. 그런데 진짜인데.

남편을 만나기 전 나는 모쏠, 모태솔로였다.

많은 이들이 천연기념물 보듯 한다. '귀하다'보다는 '희한하다'에 가까운 시선. 나 스스로도 때때로는 '으이구, 나 뭐 했냐, 연애도 안 하고' 엉뚱하게 남일처럼 한심해 아니, 안타까워한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했다. 뜨겁게. 

사랑하느라 연애를 못한 거다. 무슨 개소리를 이리 당당하게?


끊이지 않고 누군가를 좋아했던 소녀는, 쌍방이 서로 사랑하고 연애하는 행위는 뭔가 순수하지 않고 계산적이라 여겼다. 서로 똑같이 좋아할 수는 없어. 나를 이만큼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상대를 좋아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야. 너무 보고 싶어 미치겠는 사랑만 진짜 사랑이다. 미적지근한 사랑은 싫어.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한 번 멈추지를 않고 눈이 내린다.

눈 오는 날은 사랑 얘기가 제맛. 이런 날씨는 아줌마더러 소녀 감성 되어보라 판을 깔아주는 거나 다름없으니 마음 놓고 심취해보려 한다(아줌마 말리지 마요).

쌉쌀 달콤한 내 사랑의 역사 좀 거슬러 올라가봐야겠다. 입에 영 거슬리지만 '쌉쌀'이 앞에 오는 연유가 있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내 사랑의 역사는 온통 짝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 행복한 만큼 아니 때론 그보다 더 가슴 아파야 하는 그 이름, 짝사랑.     


예의 그 동료들과의 이어진 대화.

"말을 해보지 그랬어?"

"나는 늘, 고백했어."

"아......?"


사랑받는 쪽이 그것을 모르면 짝사랑, 알면서도 사랑을 받아주지 것은 것을 외사랑이라고 한단다. 짝사랑으로 시작해 외사랑으로 마침표를 찍었던 한결같던 어린 날의 내 길. 외길이었구나.

뭣이 중헌디, 내가 좋아서 죽겠는데.




첫사랑의 열병이 시작된 것은 내 나이 열 살. 내성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나와 달리 그 애는 공부도 잘했고 잘생겼다. 3학년 때 전학 온 후로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같은 반이 되었는데도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눈 적이 없을 정도로 그 애는 내게 참 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꾸준히 마음을 표현했더랬다. 너를 좋아하노라는 편지며, 선물도 건넸다. 그 정도면 모르지 않을 텐데 내색은 없었다.

섭섭함이라는 건 상대에게 뭔가 바랐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 당치 않았다. 그보다 뭐랄까. 씁쓸함.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일까' 자문했을 때 어린 소녀의 자답은 투명인간,이었다. (이성적이지 못하면서 메타인지만 뛰어난 것은 속상한 일이다.)

그 애가 외국인처럼 예뻤던 내 친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둘이 사귀었다는 말을 들은 것은 뒤늦게,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그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애가 좋았다.

고등학교 때 (아마도 나에게만)철벽남에 대한 지난한 애정이 드디어 식은 것은 새로운 사랑이 내 마음에 들어와 앉은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친구였다(여중, 여고를 다닌 탓에 남학생 구경할 기회가 없어서였나. 왜 또 초등학교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개구쟁이 짝꿍이 어쩌다 고3이 다 되어 설렘의 대상으로 변했는지.

중3 겨울 때부터였나, 그 애와 나, 둘 다 아는 교집합 같은 친구들이 계속 있었다. 어쩌다 그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그 애도 있어 함께 어울리고 그런 식이었다. 장난스럽고 자상한 그 애가 시나브로 좋아졌다. 그 애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고로 나는 다시 혼자 앓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 애는 어색해하거나 멀어지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했다. 이렇게라도 보고 싶고, 겉으로라도 친구인 듯 지내고 싶어 더 다가갈 수 없었다. 보면 떨리고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고 돌아서면 미어졌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고3 여름날 노래방 건물 계단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방 어느 칸에선가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에 꽂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그러자 그 애가 낮게 이어 불렀다.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잔인도 하여라.

여자 친구도 있는 넘이, 나를 마음에 둔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왜 내 말에 반응하는데. 그 와중에 음정, 박자는 왜 그리 정확한데. 목소리는 언제 그렇게 남자 같아졌는데. 왜 내 심장은 미친 듯 요동치고 또 왜 이리 슬픈데.


한여름 느지막이 지는 뜨거운 주황색 햇살이 계단 창으로 스며들어 그 애와 나를 비스듬히 비쳤다.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이 연출된, 오글거리는 청소년 드라마 같은 장면은 그렇게 내 기억에 박제되었다.

  

이듬해 봄 다른 지역으로 대학 진학을 했고, 눈에서 멀어지게 된 두 번째 짝사랑은 마음에서도 점점 엷어졌다.

그곳, 낯선 도시 서울에 나의 세 번째 짝사랑이 있었으니까.

이전 01화 초고속열차에서 떠올린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