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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Aug 09. 2023

17점이었지만 수포자였던 적은 없어(2)

수학 집공부 시작하기

학창 시절의 문박사는 수업 시간 충실하고 야자 시간에도 땡땡이 한번 치지 않으며 대체로 성실한 학생이라는 평을 받는 학생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문제집 위의 소설책에 심취해 있었음은 나만 알뿐이다. 그래 딴짓 맞는데...... 고딩 때잖니? 초딩 때부터 그럼 안되지. 안되지... 

이때 다시 스멀스멀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초1 교실이다. 시험지를 푸느라 고요한 수업 시간. 일찌감치 다 푼 문박사 어린이는 창밖의 파란 하늘에 시선이 멈추었다. 뭔가 떠오른다. 악상이 떠오른 천재 작곡가처럼 시험지 여백에 뭐를 끼적인다. 이후, 채점이 된 시험지를 돌려받으며 그 어린이는 무척이나 꾸중을 들었다. 선생님은 점수에 대하여 일언반구 없었다. 시험지 귀퉁이에는 당시 인기가요였던 변진섭의 '새들처럼' 가사가 야무진 필체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 어린 녀석이 그 인기가요 노랫말을 우뜨게 다 외고 적었을꼬. 총기가 있었구먼. 어릴 때부터 노래에 조예가 깊었구먼.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끼적일 줄 알았구먼. 세월에 비해 너무나 생생한 그 장면을 떠올릴 때 나는 어린 나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아이의 교과서 속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그래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냥 둘 수 없기도 했다.          



이상이 '교과서 복습하기(설명하기)' 방법을 채택하게 된 연유다. 학원이나 인강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선행은 생각도 않는 우리 집 아이에게 최초이자 유일한 인풋은 학교 수업 시간이다. 또한 이후 엄마에게 오늘 배운 것을 설명하려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머리든 마음이든 '내 것'이 안 된 것은 남에게 절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집중해서 자알 들어야 가능한 상황이 된 거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누가 누굴 뭐래.) 자기 할 일에 지장이 없다면.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는 하루하루 들쭉 날쭉이었다. 어떤 날은 오자마자 수학책을 편다. ‘엄마, 준비됐어요?’ 자신감에 찬 설명은 군더더기 없다. 너도 나도 수월한 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그렇지 못했다.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분명히 들었는데 막힌다고 했다. 아이는 그럴 때 짜증을 냈다. 그 짜증을 나는 자주 견뎠다.

     

바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깨달을 때까지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시간을 끙끙댈 필요가 있었다. 얼마나 외롭고 답답할지. 그래도 생각을 쥐어짜며 이렇게 저렇게 짱구를 굴려 보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이의 힘듦을 지켜보는 힘듦을 나도 견뎠다.

한참을 끙끙대며 답답해 울기도 했다. '안 부분까지만 설명해 보자' 제안하고 그다음 막힌 부분에는 힌트를 주었다. 그렇게 하다 결국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를 안아주며 나도 그만 시큰해졌던 것 같다.     

한 학기 내내 계속되었다. 쉬웠다, 어려웠다, 재밌다 했다, 어렵다 했다, 또 어렵고 또 어려웠다. 어려운 만큼 많이 안아주었다. 올해 5학년에 들면서는 서로에게 덜 힘들어졌다. 수학과 아이 사이, 아이와 엄마 사이에서. 아이 입에서 수학 잘해보고 싶다는 말이 나왔을 때 내 명치는 몹시 뜨거워졌다.   

 

 

물론 여전히 수월하지 않다. 수월할 리 없지.

수학이 쉽지 않은 것은 나의 유전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양심은 있는 편이다.






과목의 편중이 지독하였다. 골고루 공부하지 않기도 했으나 노력에 대한 결과도 그랬다. 공부하는 양에 비하면 국어, 영어는 이상하리만치 늘 점수가 좋았다. 수학은 음.     


초등학교 때는 글짓기와 미술 대회에서 상을 곧잘 타면서 산수 때문에 나머지 공부를 하곤 했다. 중학교 때는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반 친구들이 내 영어시험지로 가채점을 할 정도로 우수한 한편 수학은 아주 꼴이 우스웠다. 그렇더라도 사실 중학교 때 수학은 늘 바닥은 아니었다. 심히 들쭉날쭉했는데 사연이 있었다. 당시 사춘기 소녀는 한 선생님을 몹시 흠모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이 수학 과목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잘하고 싶어졌다. 그분은 심지어 다른 학년 수학 담당이어서 우리 반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밤을 새워 공부한 결과 17점, 19점을 벗어나지 못하던 내 수학 점수가 100점을 찍었다. 친구들은 과연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며 추켜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총각 선생님은 얼마 후 깜짝 결혼을 하였다. 난 슬픔과 왠지 모를 배신감에 사로잡혀 다시 수학을 놓았다. 10점대로 돌아온 것은 당연지사, 세상의 이치, 우주의 섭리. 

    


고등학교 때도 과목 편애, 편중은 계속되었다. 문학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고 그 와중에 통역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 수능 세대였던 우리는 수능에 목숨을 걸었는데, 흠흠 나로 말하자면 목숨을 걸었다고 하기엔 특히 수학 점수는 여전히 수줍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치른 첫 모의고사에서 수학과목에서 무려 중학교 기말고사와 똑같은 17점을 얻고 ‘나를 따라다니는 이 숫자 뭐냐’ 기겁했고 초월한 듯 신기했다.






수학에 진지하게 매달린 것은 나도 고3이라는 자리가 되었을 때였다. 특별한 계기랄 것이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왠지 공부를 하게 되었다. 밤 10시까지 학교에 묶여 야간 자습을 할 때였다. 그간 야자 시간에 조용히 소설 읽기, 교복깃에 이어폰 숨기고 라디오 듣기가 일쑤였던 학생이 고3 들어서면서부터는 딴짓이란 걸 안했(던 것 같)다. 고3이 뭐라고. 특히 희한하게 수학에 마음이 갔다. 애증의 그 과목에 마음이 동한 것은 일생에 처음이었고, 이 기분이 묘하고, 하다 보니 수학이 재밌어져 한 해를 통으로 수학에 매진했다. 3월부터 시작해 서서히 조금씩 점수가 오르다가 (내 역사에서) 수능 때 최고점을 기록했다. 불태운 것 치고는 12년을 등진 터라 크나큰 폭으로 오르지는 않았다. 당연할 것이고 어쩔 수 없었다. 그 과목 자체에 매력을 느껴 공부해서인지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결과에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뭐 때문에 갑자기 그리 끌렸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좋아하는 것만 편애하는 탓에 소외시켰는데 너를 좋아하게 되니 아주 그냥 빠져부러.    


      

내내 싫어하던, 관심 없던 것에 결국 한 번은 그 매력을 알게 된 것, 인생에 한 시절은 무엇에 푹 빠져본 것. 이 경험과 기억은 이후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내세울 만한 점수도, 상장 같은 것도 없으나 나만 아는 성취, 이게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나를 때때로 일으켜 세웠다.

지금 수학 공부를 힘들어하는 내 아이에게 길을 제시하되 그 후엔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고 기다릴 수 있는 힘도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힘들지만 느긋할 수 있는 은근한 자신감.(아직까지는 그러하다.)


   




수학이 잘 안 풀리는지 기운 없는 얼굴로 다가온 딸아이가 옆에 누우며 말한다.

"엄마. 엄마도 수학 못했댔지요. 나도 수포자 되면 어떡하지. 우리 학교엔 잘생긴 선생님도 없다고요."     

"응? 엄마가 수학 못 했다고 너도 못 하리란 법 없지. 그리고 네가 날 닮았다면 끝내는 좋아하게 될 거야. 엄마는 믿는 구석이 있어."

"흠."

"아, 맞다. 이건 분명히 하자? 엄마 수학 17점이었지만 수포자는 아니었다, 너?" 



          

추신) 엄마가 흠모했던 그 수학 선생님 말이야. 별명 칠뜨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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