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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Jan 04. 2023

혼자 하는 사랑도 나쁘지 않아요

않았어요.

2주 사이에 머리가 많이 길었는데? 오늘은 커트다.

여름이 다가오네, 밝게 염색을 해볼까.

너무 자주 했나, 머리가 상한 것 같은데. 조금 잘라내야겠어.

그가 나를 어리게 보는 것 같아. 성숙해 보이는 스타일로 파마를 해야겠어.

또, 뭐. 할 거 없나.


스물, 가난한 유학생 주제에 어지간히 미용실을 드나들었다. 유일한 재산인 성실함은 이런 방식으로도 발휘될 줄이야. 주말 뷔페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이고, 열심히 공부해서 받은 장학금이고, 알뜰하게 머리에 처발랐다. 철없는 년. 정신 나간 걸 인지하고 있는 걸 보니 정신이 아주 쑥 들어빠지지는 않았나 보다(직전쯤 되겠지). 그렇지만 어떡해. 그를 보려면.





4호선 노원역 1번 출구 앞 <○○헤어>에 그가 있었다.



브래드피트를 닮은 그가 담당 고객인 나에게 다가올 때면 어김없이 슬로모션으로 전환되므로 나는 수줍어진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환하게 웃으면 그 공간이 가득 밝아진다. 머리를 말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엔 선한 말투와 맑은 기운에 덩달아 나까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그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는 직업정신이 투철했다. 흘끔거리며 열심히 그를 자취를 쫓은 바로, 일터에서 진지했고 본인의 일을 사랑하는 게 보였다. 나보다 불과 네 살 위였지만 그는 나와 달리 ‘진짜 으른’같이 느껴졌다.

실력도 좋아서 그가 완성해주는 머리는 매번 마음에 들었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나 꽂힌 것에는 폭주하는 나인지라 이 검은 마음이 혹여 티가 나면 어쩌나 걱정(기대)이 되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내게 고객으로 친절한 그는 젠장, 프로더라.

다만 나를 어리게 대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 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1번 출구 오른편에 빌딩이 있고 그 빌딩 2층에 자리한 미용실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조심스럽게 살피곤 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반대편으로 오르며 흘끗거리고, 내려오며 다시 한번.


그러는 사이 일 년여가 지났다. 어느 날 머리하러 갔는데 그가 없다.

“지 선생님, 몸이 안 좋아서 고향에 내려갔어요.”

공주에서 취업하러 상경해 미용실 근처 고시원에서 산다던 대화를 떠올렸다. 혼자 그렇게 있으니 제때 챙기기는커녕, 일하다 보면 점심조차도 놓칠 때가 많다면서도, ‘다 그렇지 않나요’ 웃으며 예사로이 말하던 그였다. 몸이 축이 안 나고 배기면 이상하지. 속이 상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직원에게 더 묻지 못했다.     


십자수를 뜨고 싶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개발, 아니 개손인지라. 손으로 뭔가를 하는 건 재주도 흥미도 없는 사람인데. 십자수 가게로 곧장 갔다. 사랑스러운 그림의 도안을 고르고 바로 거기 앉아 배웠다. 그날부터 십자수를 뜨기 시작했다. 한 시간 걸리는 등하굣길에 지하철에서 떴고, 집에 와서도 떴다. 그리워서, 뜨고 또 떴다.

1번 출구에서 오르내리며 훔쳐봐도 그는 거기 없고, 전화번호를 몰라 목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목적지 없이 밤늦게까지 걷고 걸었다. 그를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잠들지 못했다. 밤을 홀딱 새웠다. 너무 보고 싶어 몸이 아팠다. 며칠을 꼬박 앓았다. 고전 문학에서나 등장하던 상사병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그를 그리며 한 수 한 수 완성한 십자수로 쿠션을 만들고 포장했다. 그 미용실에 올라가 마침 프런트에 나와있던 원장에게 그의 연락처를 청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만히 종이에 번호를 적어 내게 주었다. 거리로 나와 종이를 폈다. 떨렸지만 망설이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다시 상경한 그를 카페에서 만났다. 십자수 쿠션을 건넸다. 내 마음도 같이. 뭐, 이딴 걸? 하는 쓸모없는 종류의 선물일 수도 있는 그것을, 그는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예뻐서 못 풀겠다.” 웃으며.  


그 겨울, 그와 한 번의 식사를 했다. 어디서 무얼 먹었는지 희한할 정도로 기억나지 않는다. 손에 든 숟가락을 입으로 무사히 가져가긴 했는지.

'촌스럽게 너무 긴장하고 말았어.'

이후 그는 하계역 근처 작은 미용실로 옮겼다. 여전히 미용사와 손님 관계였지만 그를 만나러 갈 수 있어 기뻤다. 가끔 그에게 머리를 하면서 두어 시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이듬해 봄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문박사는 착하고 똑똑하니까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휴대폰 속 흑백 화면을 몇 날 며칠 봤다. 화면이 꺼지면 다시 꾹 눌러 켰다.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성향으로 짐작하건대 가볍게 쓰고 휘릭 보낸 한 글자 한 글자가 아니리라. 따뜻함과 단호함. 단 한 문장의 행간에 단순하지 않을 그의 뜻이 보이는 듯했으므로, 그리 했다. 답장하지 않았다.

삼 년의 짝사랑, 외사랑이 끝났다.




오랜 마음을 접은 나는 휴학 후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이십 대의 전반전에 너무나 뜨겁게 타오른 후 완전히 연소해 버렸는지, 후반전에는 그런 쪽의 세포라고는 재만 남은 모양으로 건조하고 심드렁했다.

어쩌다 내게 향했는지 모를 남자사람들의 성의는 거울반사, 무지개반사였다. 대학생활 날 좋아해 준 과 선배에도, 학원에서 지켜봤다며 따라 나와 쪽지를 건넨 남학생에도. 고마웠지만, 그냥 고마웠다. 독서실에서 내 자리에 '오뎅 먹으러 같이 갈래요?' 붙은 포스트잇은... 할많하않. 조용히 떼서 버렸다. 어묵이라고.


'내가 좋아해야, 좋아 죽겠어야 진정한 사랑이야.'

이런 외골수가 어처구니없었을까. 고되 보였을까.


첫 직장에서 만난 입사 동기이자 동갑내기인 이 남자사람친구.

온기와 열기 사이, 그 정도 느껴지게, 보이게 안 보이게 그림자처럼 자꾸 근처에 있는 너. 그런데 밀어내고 싶지가 않더라.

"요즘 어떤 사람 때문에 잠이 안 와..." 하는 너의 가만가만한 고백에

"그게 나니?"


네가 계속 한기를 막아줬으면 싶더라.

십 대를 꽉 채우고 이십 대 전후반에도 답 안 나오는, 딱한 내 사랑역사에 연장전 극장골이 이렇게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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