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할머니라 함은 외할머니 한 분뿐이다(친할머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던 터라 나와 동생은 종종 할머니, 할아버지께 맡겨지곤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선 시골 동네에 작은 구멍가게를 하셨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는 라면을 해주시지 않으셨어서,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께 라면을 먹고 싶다고 삐약삐약 거리곤 했다. 구멍가게엔 라면 외에도 군것질 거리가 많아서 아폴로, 쌀대롱, 꾀돌이, 쭈쭈바 등을 맘껏 먹었다.
할머니 집 뒤뜰엔 감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삼촌들이 나무에 올라 감을 따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었다. 나는 나무 밑에서 잠자리채로 감을 '똑' '똑' 따면서 거들었다. 무슨 사명감이 불타올랐는지, 부들부들 까치발을 들어가며 열심히 거들었다.
열심히 따고 나면 삼촌들은 항상 감 몇 개를 남겨놓곤 했었는데,
나무 위 몇 개 남겨진 감이 까치밥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초등학생 고학년쯤 돼서는 할머니 집에 가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가기 싫어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 할머니 집에 맡길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내가 감을 따러 가는 것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선 홍시 한 상자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오시곤 했다. 상자 안의 홍시는 어찌나 탐스러운지 하루에 2~3개씩은 꼭 먹어치웠다.
며칠 뒤, 할머니 집을 갔었는데 방구석에 놓인 신문지 위에 홍시가 있었다.
그 홍시들은 내가 받은 상자 안의 홍시와는 달리 못생기거나 터져있었다.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니께 물어봤다.
'엄마, 할머니는 왜 터진 홍시를 드셔?'
그때 어머니는 별말씀 없이 웃기만 하셨다.
상자 안의 홍시, 당신께선 터진 홍시를 드시고 나에겐 예쁜 홍시만 주셨던 것이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취업하고 나서는 어른들께 세뱃돈을 받은 적이 없다. 월급이 들어옴과 동시에 세뱃돈이 끊긴다는 것은 보편적인 룰이지만 사실 2년 정도는 세뱃돈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꽤나 어색했었다. 돈을 받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아쉬움이지만 어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바뀜으로써 생기는 어떤 머쓱함이 있었던 것 같다.아마도 '어른 - 아이'의 관계에서 '어른 - 어른'의 관계로 바뀌는 과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 따위는 없도록 한결같이 내게 세뱃돈을 챙겨주신 분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우리 할머니다.
할머니는 당신의 돈을 장롱 속에 숨겨두시곤 했는데, 장롱 속에서 꺼내 내게 건네주신 꼬깃꼬깃한 만원 짜리 한 장은 내게 가장 소중한 세뱃돈이었다. 내가 스무 살이던, 서른 살이던, 학생이던, 직장인이던, 할머니에겐 나는 언제나 귀여운 손주였나 보다.
변함없이 나를 '아이'로 봐주시는 할머니의 눈빛에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함을 느끼곤 했다.
몇 년 전 따뜻한 어느 봄날, 한결 같이 나를 아이로 대해주시던 할머니를 떠나보내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