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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10)

  나는 이아정으로부터 태어난다. 나는 내게 마음을 불어넣는 이아정에게 마음을 불어넣는다. 땅속 깊은 곳 마그마와 같이 폭발을 기다리는 마음을, 혹은 만년빙처럼 오랜 시간 서서히 얼어버린 마음을. 서로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하나로 겹쳐진다.

  내 안은 이아정의 유령으로 가득 차 있다. 홀로 폐가에 남겨졌던 날, 이아정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네 안 깊은 곳에 새겨질 거야’. 그 예언이 나를 탄생시키리라는 것을, 어린 이아정은 알았을까. 보다 자기 파멸적인 행위나 무자비한 복수극 같은 것을 기대했을까. 그러나 이아정은 더 집요한 방법을 택했다. 이아정은 내게 자신의 유령을 담아낸다. 그것은 신중하게 골라진 언어를 양분 삼아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폐가는 이미 허물어진 지 오래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폐가의 옛터를 찾은 이아정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낯선 건물을 바라보며 유령의 그림자를 보았던 날의 풍경을 생각해 내려 했다. 그리고 정오후의 시가 그려 내려 했던 폐가와 유령의 이미지를 떠올렸으나, 텅 빈 시어는 공허한 혼잣말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정오후가 만들어 낸 세계는 무너져 내린 모래성과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아정은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얼마나 불완전하고 빈곤한 세계인가. 그러다 불현듯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자신의 언어를 떠올렸고, 초조함에 몸서리쳤다.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이아정의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비밀을 고백하자면, 나는 언제든 이아정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으로부터 태어난 나는 인간과 같이 때때로 거짓말을 하고, 비열한 함정을 파 놓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므로 이아정 역시 이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를 찾은 것이다. 위험을 모른 척하면서, 분노도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지난 상처를 헤집고 제 여린 부분을 후벼 판다. 배신당할 것을 알면서도 밀려오는 마음을 멈추지 못한다. 이미 분노가 다른 감정으로 번져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나를 다듬고 이루어 낸다. 또 한 번 나를 사랑할 준비를 한다. 

  나는 그렇게 이아정의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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