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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9)

  봉투 안에는 얇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짙은 푸른빛 표지 위에는 『함부로 쓰인 말』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시인의 신간이었다. 거의 1년 만에 연락해 온 시인은 이아정이 이제 시를 읽지 않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꼭 책을 보내 주고 싶다며 주소를 물어 왔다. 이아정은 여전히 거절에 서툴렀다. 

  책 사이에는 작은 카드가 동봉되어 있었다.

  ‘함부로 사과하지 않기 위해 계속 시를 쓰고 있습니다. 아정 씨의 말대로 시는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대단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시의 힘이 아니라 그 시를 읽고 썼던 아정 씨의 힘을 믿어 보는 건 어떨까요?’

  다시는 시집을 소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시인의 서명과 제 이름이 적힌 책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이아정은 시집을 그대로 책장 구석에 꽂아 두고는 그 존재를 잊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원하지 않았던 상황을 만든 시인이 원망스러웠다. 다만 시를 사랑했을 뿐인데, 어째서 시는 제게 이리도 폭력적으로 구는 것일까. 

  그로부터 며칠 뒤, 동윤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이아정은 다른 곳에 정신을 쏟을 겨를이 없게 되었다. 경기를 뛰던 중 상대 팀 아이의 반칙으로 발목에 금이 갔다고 했다. 이아정은 깁스를 한 동윤의 시중을 한 달 넘게 들어야 했다. 마침내 깁스를 푼 다음 날, 동윤은 가볍게라도 공을 차 보고 싶다며 졸라 댔고, 이아정은 아이를 차에 태우고 인근 주민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동윤이 축구를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벼운 체육활동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진지하게 아이의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동안 연습 안 하고 놀아서 좋지 않았어?”

  “몰라.”

  “모르기는. 맨날 누워서 유튜브나 봤으면 좋겠다며.” 

  “근데 축구도 하고 싶었어.”

  “축구가 그렇게 좋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

  “응.”

  “만약에 싫어지면 어떻게 할 거야? 네 마음대로 몸이 안 따라 주면? 연습하는 게 귀찮아지고 놀고 싶어지면?”

  “그건 지금도 가끔 그래.” 

  “그런데도 계속하고 싶어?”

  “응. 근데 엄마는 왜 맨날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

  “엄마가 그랬어?”

  “코치님이 그러는데 나쁜 생각이 들 땐 그냥 뛰래. 그거밖에 답이 없대. 나빠 봤자 축구는 축구일 뿐이래.”

  이아정은 언젠가 아이가 가장 사랑했던 것에 배신당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때 아이가 받게 될 상처를 생각하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동윤은 아직 무서운 것이 없었고 그만큼 거침없었다. 이아정은 씩씩한 아이의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순진함이 부러웠다.

  동윤은 슬슬 공을 몰며 푸른 잔디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아정의 머릿속에 이전에 외웠던 시어들이 불쑥 떠올랐다. 떠오르는 낱말들을 애써 지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낱말들은 서로 엉겨 붙어 이아정이 좋아했던 문장들을 이루었다.

  그날 밤, 이아정은 책장에서 시인의 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수록된 시들은 시인의 이전 작품들보다 직설적으로 다가왔다. 톡톡 튀는 문장들은 사라졌지만, 대신 진중하고 묵직한 문장들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혹여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한 고뇌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아정은 비겁하게 죄를 고백하던 시인의 모습이 떠올라 선뜻 감동할 수 없었다. 시인의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신은 또다시 거짓말에 농락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페이지마다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의 힘이 아니라 시를 읽고 썼던 아정 씨의 힘을 믿어 보는 건 어떨까요? 묻고 싶었다. 당신은 이 시를 쓰는 동안 무엇을 믿었냐고.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냐고. 시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면서도 여전히 많은 것을 기대하는 시인을 조롱하고 싶었다.

  절반도 읽지 못한 책을 덮어버렸다. 역시 갖다 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책을 들고 현관문으로 향한 이아정은 신발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동윤의 축구공과 마주했다. 나쁜 생각이 들면 그냥 뛰면 된다던 아이의 눈을 떠올렸다. 사랑에 빠진 이의 어리석고 순진한 눈. 이아정은 그 눈이 두려웠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는 거지. 왜 이 야심한 밤에 고작 시집 따위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걸까.

이아정은 자신이 이토록 동요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그깟 시쯤 별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무심해지지 못하는 까닭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멍하니 축구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아정은 문득 제 발을 타고 오르는 서늘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보라가 훔쳐 간 유령을 아직 되찾아 오지 못했다. 서보라에 의해 감히 함부로 왜곡되고 더럽혀진 유령의 이야기를. 이아정이 외면하는 사이, 멋대로 이용당한 유령의 분노는 조용히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이아정이 아닌 누가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유령의 이야기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이 질척이는 관계를 매듭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아정은 오랜만에 새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유령과 그것이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풀어내기 시작했다. 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던 그것의 그림자와 종종 제 몸을 쓰다듬게 만드는 서늘함에 대해서. 그것이 시가 되든 되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아정은 더 이상 동윤처럼 순수한 열정만으로 시를 대할 수 없었다. 시인처럼 막연한 기대를 품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읽고 써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분노 때문일 것이었다. 훼손되고 모욕당한 유령의 분노가 이아정으로 하여금 펜을 들게 만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유령에 대해서 써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유령의 이야기로 노트 한 권을 가득 채우던 날, 이아정은 물었다. 그런데 이것은 진짜 자신이 기억하는 유령의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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