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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8)

  이아정은 오래전 어느 영화 홍보 포스터에서 인간이 죽는 순간 영혼의 무게 21g이 줄어든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 1년간 이아정의 삶에서 시가 차지했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줄어든 무게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가벼웠는지도 모른다. 이아정이 시를 사랑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시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불가결한 존재가 아니니까. 시집이 빠진 책장만이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려 주었지만, 그 자리는 이미 동윤의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실 이아정은 정오후가 서보라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도 몇 번인가 시를 써 보려 했었다. 서보라가 거짓된 시로 스스로를 속이며 좋은 사람인 척 굴었듯, 자신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어쩌면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자기기만. 좀 더 나아지고 있다는 착각.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구질구질한 문장들뿐이었다.

  이아정이 시를 멀리하자, 남편은 이제 취미 생활에 시들해졌냐고 물었다. 이아정은 필사적이었던 제 마음을 단순한 취미 생활로 매도해 버린 남편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가벼운 취미로 여겼다면 더 좋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여전히 시를 읽고 있었을지도.

  이아정은 정말로 취미 삼을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새로 시작한 뜨개질은 복잡한 머리를 비울 수 있어 좋았다. 동윤의 스웨터를 완성했을 때는 뿌듯하기도 했다. 몬스테라 화분도 하나 들여놓았다. 쑥쑥 자라나는 식물은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때때로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이 이아정을 덮쳐 오곤 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빈 광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시를 읽고 썼던 자신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아정은 여전히 이아정일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아정. 비굴하고 비겁한 이아정. 그사이 윤채영의 아들 하준은 축구 교실을 그만두었다. 동윤과 하준은 여전히 친하게 지냈으나 전과 같이 붙어 다니지는 않았고 자연스레 윤채영과 마주칠 일도 적어졌다. 그러나 카페 모임에는 또 다른 윤채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윤채영보다 더 극성맞게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여자였다. 그녀가 제게 부당한 요구를 해 온다면 자신은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이아정은 종종 로커룸을 비우고 건물을 나서던 아이의 뒷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테스트 심사 논란 당시, 이아정은 결국 윤채영의 지시대로 심사 기준 공개를 요청했었다. 공개 결과, 심사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판정이 났고 학부모들은 의외로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치 모든 게 이아정을 골탕 먹이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이 문제 삼았던 아이는 결국 축구 교실을 떠났다. 다시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시를 읽고 쓰던 그 시간 동안 이아정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되었나. 이아정은 시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돌이켜 보았다. 블로그에 편집되어 실린 시구들은 시의 본의를 훼손하고 있었다. 이아정은 그 토막 난 문장에 눈물을 흘렸고 멋대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아정과 시의 관계는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 시에 대단한 힘이 존재할 거라는 오해. 그런 시가 자신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 그러나 시는 시일 뿐이다. 이아정은 허무함을 떨쳐 내기 위해 시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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