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떨어졌다. 폭염이 기승을 부려도 은행나무는 제 할 일을 한다. 신비롭다. 달라진 환경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교정의 문이 열렸다. 초록빛 노선을 따라 학교로 향한다. 폭풍 전의 한밤중이 그리 고요하다 했던가. 등굣길이 가볍다. 깨끗한 달력은 나에게 한가로움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조만간 마주 해야 할 일을 떠올리자니, 귀갓길이 자주 어두워진다.
연주 수업. 음악대학 학생들은 학생 앞에서 홀로 연주해야 한다. 남에게 무엇을 보여준다는 것은 마음을 짓누른다. 특정 분야에 짧지 않은 세월 몸 담근 이들 앞에서라면 더더욱. 나는 난생처음 보는 곡을 한 달 후에 연주해야 한다.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내 두려움의 기저에는 욕심이 숨겨져 있었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 이 욕심이 현실과 괴리가 클수록 두려움은 증폭한다. 공포가 깃든 마음이 육체와 공명한다. 몹시 떤다. 잘 될 것도 안 된다.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기. 받아들이고 할 일을 할 것. 나에게 스스로 건네는 만트라다. 수행자의 마음으로 빈 공간을 채우기. 근육에 가락을 새기기. 'I will permit the fear to pass over me and through me.' 그리하여 두려움이 몸을 훑더라도, 손으로 깃들지 않게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