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자주성 회복
'국악개론' 강의 중 보고서
세종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는 말들이 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칼 마르크스가 『경제학비판』 서문에 천명한 말 하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 『맹자』에 적힌 말 둘. 조선의 이념과 정치 체제에서 음악은 불가분 하다. 음악은 정신을 생명으로 삼는다. 천상의 올림포스에서 음악을 주관하는 이는 아폴론이었다. 2500년 전부터 선비들에게 추앙받은 공자는 뛰어난 연주자였다. 정점頂點에 선 곳에서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부유한다. 반대로 지구에서는 어느 것 하나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무언가를 세울 때는 아래가 두터워야 한다. 두텁지 못한 제방은 무너져 내린다. 세종의 치세 동안 발명된 정간보, 종묘제례악의 정비, 정대업, 보태평, 여민락 작곡, 편경의 제작은 당시의 경제, 국방의 안정을 방증한다. 농사직설의 보급, 세수 확보, 4군 6진의 개척, 왜구 토벌.
세종은 사람 보는 눈도 탁월했다. 장영실, 황희, 김종서, 박연. 기라성綺羅星 같은 이들과 길이 빛날 업적을 이뤘다. 그중 박연과 함께한 일은 눈여겨 볼만하다. ‘묘청의 서경 천도’를 두고 단재 신채호는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일컫는다. 사대주의를 벗어나고자 했던 ‘자주성 회복’. 이 하나만으로 제일이라 부른 것이다. 세종은 박연과 함께 단재 신채호가 가슴에 품었던 조선의 자주성을 회복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아하게 예술적으로.
황종 율관의 자체 제작. 이는 도량형의 통일이요, 세상의 흐름을 한 곳으로 모은다. 황제다운 물건이다. ‘황종黃鍾’은 12율의 으뜸음이요, 두루 편만해야 하는 낮은 음이다. 황黃색은 중앙을 의미한다. 즉 황제의 색이다. 세종과 박연은 이 물건을 천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든다. 황종 율관이 제작되니, 홉, 되, 말의 수치가 안정된다. 조선을 명의 제후가 아닌, 명과 동등한 황제국으로 격상했다.
편경의 자체 제작, 종묘제례악에서의 향악(정대업, 보태평)의 사용은 조선의 국격을 황제국으로 고정한 것과 다름없다. 『논어』의 「팔일」을 읽어보면 세종이 ‘황제’로 자칭하지 않았을 뿐, 조선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공자가 그토록 돌아가고픈 주周나라는 천자의 나라이므로 제사에 팔일무八佾舞를 춘다. 천자를 돕는 제후는 육일무를, 제후를 돕는 대부는 사일무를 춘다. 『논어』의 「팔일」에서는 대부인 계손씨가 팔일무를 추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팔일무’는 천자의 것이다.
종묘제례악 때, 역시 일무를 춘다. 이 일무에 동원되는 무용수는 64명이다. 즉 ‘팔일무’다. 종묘제례악이 울리는 순간, 위패에 모신 이들은 황제요, 종묘에서 신을 부르는 산 자들은 황제의 후손이 된다. 세종은 조선을 황제국과 다름없이 보았다.
아폴론이 다루었고, 공자가 가르친 ‘음악’은 고귀한 것이다. 그러기에 음의 파동이 가닿으면 모든 것은 격상된다. 세종과 박연은 음악으로 800년 전, 나·당 동맹에서 뿌리내린 사대事大를 걷어냈다. 일상에서 쉬이 입에 오르내리는 ‘자주성’을 이리도 고귀하고 아름답게 구현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