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리도 잔혹한가. 그리고 아름다운가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관하여

by 호원샘

*"진격의 거인"에 대한 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 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 블레즈 파스칼(이환 옮김), "팡세"(2003, 민음사) 중 '인간의 의식에서 신으로의 이행' p. 213 -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인생의 부조리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거인들의 인간 사냥에 인류는 삶의 터전을 잃고 '월 마리아'라는 성벽 안에서 존속한다. 성벽 안의 인류는 유일하게 그들만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다고 여긴다.

"진격의 거인" 중 '월 마리아' 시간시나 구

작품에서는 죽어 마땅한 자는 살고, 죽어선 안 될 것 같은 인물들이 가차 없이 죽어간다. 신중을 기했던 선택은 때론 절망을 선사한다. 주인공을 지키려던 동료는 처참하게 죽어가고, 신뢰했던 동료는 학살의 주범자였다. 심지어 소수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인류 존속에 절실한 조직을 탄압한다.


"팡세"에 적힌 말대로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다. 인간이 무너지는데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재해를 비롯한 여러 사고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권력과 이권을 지키기 위해 무고한 이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이러한 부조리에서 인간은 무력하고 절망을 느낀다. 작중 초반에도 시청자로 하여금 경악하게 하는 장면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삶에의 의지를 다지는 이가 있다.


주인공 에렌의 전사 소식에 미카사는 절망한다. 그녀는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거인에게 저항할 의지를 상실한다. 그 순간 그녀가 떠올린 것은 무엇일까. 에렌이 괴한들로부터 자신을 구한 후, 그녀에게 둘러준 목도리였다. 그녀는 이미 절망에서 들어 올려진 경험이 있었다. 에렌의 붉은 목도리가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미카사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부러진 칼날로 거인의 손가락을 베며 목숨을 보존한다.


역으로 소소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적'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들도 심심찮게 나온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으로 '규정된' 사람)을 죽이지만, 그들이 돌아가고픈 곳은 전장이 아니라 가족의 품이었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서슴없이 손에 피를 묻힌다. 그녀의 말대로 인생은 잔혹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 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 블레즈 파스칼(이환 옮김), "팡세"(2003, 민음사) 중 '인간의 의식에서 신으로의 이행' p. 213 -


글의 처음에 인용했던 대목이 위와 같이 이어진다. 전쟁, 재해 그리고 기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부조리의 흐림은 실재한다. 이 흐름 속에서 인간은 나약하다. 갈대처럼 쉽게 부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존엄을 말한다. 이 존엄은 '사유'로 이루어지며, 사유는 '나'에서 비롯된다. 잔혹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린 미카사처럼, 추억의 상기는 사유의 한 부분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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