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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혜원 Apr 01. 2021

[단편 소설] 네가 없는 반경

또다.   꿈에 네가 예고 없이 들어와선 무너지는 것을 반복하게 했다. 우린 서로가 도망쳤던 기억밖에 없는데,  삶이 싫어져서 도망치고 있는 곳에  네가 있다니.  모든 반경 끝엔 네가 있을까.


우린 북적이는 도시 가운데와 멀리 떨어져 있는 미술관 입구의 계단에서 스치듯 만났다. 언뜻 보기에도 꽤나 오랫동안 직모였을 것 같은 머릿결. 또릿한 눈. 체구보다 조금 더 헐렁한 검은색 니트를 입고선, 얇은 손가락 사이에 연초 담배를 끼워 내내 고민하는 듯한 손의 움직임. 길가의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도 유난히 그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유독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금연 구역인 이곳에서 손가락에 끼워둔 것을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뭘 하려고 하시는 건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생각하시는 그거 여기서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당황한 듯한 표정을 잠깐 짓더니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작은 가방 안으로 던지듯이 넣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곤 덩달아 당황스러워졌다. 처음 본 사람에게 너무나 직설적인 부탁을 한 것 같아서. 그도 내 표정을 읽고선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띤 채로 아주 잠깐씩 웃기만 했다. 그 찰나에 동요하듯 한동안 따라 웃으며 내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고 물어보는 것도 참 그렇지만... 웃기게도 당신 이름이 궁금한데요.”

함박웃음을 띤 채로 그는 대답했다.

“류서예요. 류서. 이름이 조금 어렵죠.”


나뭇가지들 사이 하얀 안개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던 날 뒤로 류서와 자주 만났다. 예술을 눈으로 담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류서와는 독립 영화를 자주 보러 다녔고, 숨어있는 전시회를 찾는 것을 즐겼고, 흔하지 않는 풍경을 사진에 담아 서로에게 선물할 때, 서로가 자주 듣는 노래의 제목을 적어주는 순간을 좋아했다.


어느 서늘한 밤의 류서는 위스키를 홀짝 마시면서 대뜸 말했다. “마음에 솔직한 게 왜 나약한 게 되는 건지 난 잘 모르겠어요.”

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날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이지 드물었다. 나는 그런 류서의 목소리의 진동을 잠자코 들어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요? 왜 솔직한 게 문제가 될까요. 왜 마음에 솔직해지면 상처를 받는 걸까요. 전부를 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막아서는 기분이 너무 힘들고, 가끔은 지칠 때가 있어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솔직해지고 싶잖아요, 지금처럼...”

류서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었다. 내내 손을 떨면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어떤 하루였는지 보다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류서가 슬픈 마음을 하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하루의 기분을 묻는 건, 류서에게 온 슬픔이 사라졌을 때 묻고 싶었다. 그저 말없이 류서를 품에 안고 그래도 괜찮다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도 너를 나무랄 사람이 없다고, 너를 우선으로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한참 동안 서럽게 울던 류서는 두 눈빛에 두려움을 가득 안고 말했다.

“저 계속 옆에 있어도 돼요? 그래도 정말 괜찮을까요?”

나는 조용하게 끄덕였다. 두려움이 가득한 너의 눈빛에 조용한 확신을 가득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 뒤로도 류서는 사랑을 자주 망설였다. 아마도 나를 망설여했다고 하는 게 맞는 거겠지. 여러 계절을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에도 류서는 자기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럴 때마다 류서가 떠날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확신을 주겠다고 한 것은 나였는데, 늘 불안해하는 류서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장 곁에 두고 싶은 류서에게 상처를 조금씩 나눠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확신을 주고, 서로가 다시 불안해하는 것을 줄곧 반복하던 우리였다. 하얀 안개가 짙던 하늘을 바라보며 웃던 우리는 언젠가부터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꽉 붙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듯 아프기 시작했다. 약이나 사러 나가야겠다며 후줄근한 티셔츠를 손에 쥘 때, 류서에게 전화가 왔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목을 여러 번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을 때 류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던 류서는 한숨을 푹 쉬고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도대체 어떤 게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알고 싶어서 류서에게 여러 번 재차 물었다. 류서는 두려움과 미안함 사이에 미련을 가득 숨기고선 물음에 대답했다.

“그냥 미안해요. 나 도망치는 거 맞고, 앞으로도 도망치기만 할 것 같아요. 내가 자신이 없어요.”

이 말을 뒤로하고 류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류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류서의 집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봐도 류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늘 도망치기만 하던 순간을 모른 체하던 날처럼, 우리의 마지막도 그랬다.


류서야. 류서 네가 없는 내 삶은 낭만도 없는 허무한 삶 끝에 있는 느낌이었어. 그렇지만 네가 있던 내 삶은 만질 수 없는 마음을 그대로 두고 보고만 있는 기분이었어. 그걸 오랫동안 견디는 기분이었어. 그런데도 내 눈끝은 언제나 널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어떤 물길을 가르고 거쳐왔는지, 얼마나 자주 무너졌는지 충분히 알면서도, 기어이 네가 또 생각이 났어. 그 생각의 끝엔 언제나처럼 네가 있었어. 이유는 모르겠어. 이유를 알더라도 난 지금처럼 똑같이 대답하겠지. 넌 어떤 것보다 가장 여운이 길던 사람이었어. 그때 너와 있던 내가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었길래, 어떤 바다 곁을 맴돌고 있었길래 그 찰나를 떠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건지조차 자주 헷갈리게 만들던 사람이었어. 그만큼이나 넌 아주 오랫동안 여운 짙은 사랑이었어.

다음 생엔 내가 너 없이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얼른 이 봄이 지나가길, 얼른 네가 없는 반경에 도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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