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일수록 가벼워지는 삶의 무게
나는 패션을 좋아하는 만큼 뷰티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메이크업에 관심을 가졌고, 다 쓰지도 못할 화장품을 종류별로 수십 개씩 사모으곤 했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너는 대체 립이 몇 개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한 듯 안 한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추구했기 때문에 신경 써서 화장하면서도 과해 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화장을 안 한 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메이크업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30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흔히 하는 ‘여자들은 외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로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시간들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유롭고 느긋하게 준비할 뿐, 화장에 많은 시간을 쏟지 않는다.
미니멀 메이크업이 가져다준 효과는 분명했다. 화장을 줄임으로써 절약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1. 돈
한국의 화장품들은 놀라울 만큼 질이 뛰어나고 가격도 저렴하지만, 그걸 핑계로 야금야금 쓰는 돈이 주기적으로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큰 금액이 된다. 담배 한 갑과 같은 무의식적 소비는 지갑에서 돈이 줄줄 새게 만드는 주범이다. 색조화장품은 담배만큼이나 무익하며 중독적이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 돈으로 주식이나 살 걸 그랬다며 한탄했다. (물론 주식도 위험하지만...)
2. 시간
화장의 단계가 많아질수록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러나 소요되는 시간에 비해 나타나는 효과는 너무나도 미미하다. 내가 오늘 하이라이터를 했는지, 눈 밑에 글리터를 발랐는지, 블러셔를 했는지 안 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또, 메이크업은 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무너지는지 몇 시간마다 수시로 체크해줘야 한다. (공들여한 화장이 쉽게 무너져버리는 순간 기분마저 처진다.) 화장이 잘 먹은 날에는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는지도 생각해 보면 메이크업과 관련해 쏟게 되는 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내게 맞는 화장품을 찾아내느라 고민하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고작 두 가지지만 돈과 시간의 가치를 환산해 봤을 때 화장을 함으로써 낭비되는 자원은 굉장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난 이렇게까지 화장을 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깨끗한 맨얼굴을 좋아한다.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 어른들이 너희 나이 땐 화장 안 한 얼굴이 제일 예쁘다는 말을 해줬던 것과 같은 마음이다. 내겐 모든 사람들의 맨얼굴이 가지각색 매력적으로 보인다. 화장이 그 사람의 매력을 크게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화장의 유무에 따라 타인의 면전에 대고 불쾌한 말을 내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많은 화장품을 버리게 됐다. 쓰지 않지만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화장품,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이 한 무더기가 나왔다. 제대로 쓰지도 않을 화장품을 이렇게나 많이 모아둔 건 분명 내면 깊이 내재한 외모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거다. 그 시절의 나는 확실히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에 뭐라도 바르지 않으면 집 앞 슈퍼도 제대로 가지 못할 만큼 내 얼굴을 부끄러워했다. 사소한 지적들은 내면에 쌓여 나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었고, 화장이라는 얇디얇은 방패 없이는 밖에 나가기 어렵게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동네를 활보해도 아무렇지 않다. 누군가 내게 한 소리 한다면 맞받아쳐줄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클렌저 하나로 쉽게 무너져버릴 화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종종 가벼운 화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맨얼굴로 가볍게 나서는 일이 훨씬 많아졌고, 그게 더는 두렵지 않다.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의 편안함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스크나 컵에 화장품이 묻어나지 않고, 번질 일도 없으며, 지워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언젠가는 무색 립밤만으로도 어디든 즐겁게 외출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