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간을 함께한 글
열일곱 살의 나는 병원에 있었다.
가을에 처음 그곳에 들어가 다음 해가 되어 퇴원을 할 때까지 병원 생활이 이어졌다. 그곳의 시간은 밖의 세상보다 1.5배 느리게 흘렀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교실에 앉아 저녁까지 수업으로 꽉 채워진 수험생이 하루아침에 제로가 되었다. 병원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아침, 점심, 저녁 세 끼의 식사와 제때 약을 먹는 일이 전부이다. 그렇게 할 일이 없는데도 오전/오후에 한 시간의 '휴식'까지 일과표에 들어 있다. 환자에게 필요한 안정을 위해 모든 요일이 같은 날처럼 흘러갔다.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얼마나 지났을까. 병동 생활을 하다 보니 날짜와 요일의 감각이 없어졌다.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수학 수업이 많은 월요일, 체육 수업이 있는 수요일과 같은 일상의 흐름이 사라졌다. 매일 아침에는 하루 전에 본 인기 드라마 줄거리를 한참 떠들었는데 그 평범한 일과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병원에서야 알게 됐다. 하루에 하는 말이 고작 열 줄이나 될까 말까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길게 말하려고 하는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한참 배우고 성장할 시기에 나는 거꾸로였다.
어느 날 내 앞으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보내준 책 한 꾸러미였다.
교내 환경미화 대회 수상으로 받은 상금으로 병실에 있는 친구에게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친구들이 고민해서 보냈을 상자에는 소설과 에세이와 여행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책 상자는 내게 꿈이고 희망이었다. 매일 지겹다고 생각하던 학교였는데... 새벽 6시 병원을 지나는 버스 소리를 들으면서 교복 입고 등교하는 그 길이 눈에 어른거렸다.
책장을 넘기듯 조용히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하루치의 약을 넘기고, 산책을 했다. 나중에는 아는 사람이 생겨서 대화도 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책과 일기장이 친구였다. 그때의 일기장에는 짧지만 간절했던 문장들이 꾹꾹 눌러져 있다. 매일같이 면회를 온 엄마와의 대화, 그 계절에 만난 정원의 향과 색, 그리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책 속의 문장을 옮겨 쓰곤 했다. 그때만큼 간절한 글을 썼던 적이 있었을까.
가장 힘들었을 때 매일 똑같은 다짐을 썼다.
"입맛이 없어도 밥은 다 비우자" "다음달에는 퇴원을 하고 싶다" "엄마와 함께 걷는 정원에는 하얀 천리향이 피었다" 짧은 문장들이 의지가 되고, 결심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봄이 되었을 때 다시 학교로 복학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책과 노트는 언제나 곁에 있었다.
책에는 흰 종이와 검은 잉크 위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고, 작가가 보여주는 무한한 상상력을 즐겼다. 각양각색의 이야기 속에서 내 삶을 위한 힌트를 찾아내는 일은 보물 찾기와 같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이 있어도 서점에 가보면 누군가 써 놓은 책이 있다. 누군가는 그 길을 걸었고 정성들여 글로 남겨 둔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그리고 혼자 일기장과 메모지에 생각나는 이야기를 쓰는 시간은 고요한 명상과도 같다. 한 단어씩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쏟아내는 동안에 마음은 평온해졌다. 그렇게 읽고 쓰는 시간은 내게 위로이자 치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