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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Aug 24. 2020

파리에서의 6시간

파리 북역에서 브뤼셀 중앙역까지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유월이 시작되는 첫째 날이었다. 체크 아웃을 10분 남기고 호텔에서 나왔을 때가 오전 10시 50분. 브뤼셀 중앙역행 기차 탑승까진 6시간이 남았다. 마레 지구에 있는 <이본 램버트 Yvon Lambert> 서점에 들러 남편의 사진집 <Loir> 3권을 배달해야 하는 것 빼곤 여유로운 일정이다. 그러니까 6시간 뒤, 우리는 브뤼셀로 떠나는 기차를 타기 위해 파리 북역에 있어야만 한다.


몽파르나스 묘지를 둘러싼 푸른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매직 아워에 황금빛으로 물든 몽파르나스 타워, 몽파르나스 역 공사장 가로막 뒤로 흩날리던 금빛 모래 알갱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메트로를 향해 달려가는 소년과 소녀의 뒷모습,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와 담배 연기 속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파리지앵, 이방인에게 축축한 콧잔등을 내어준 덩페흐 호텔의 고양이, 모두 모두 안녕.  



파리 북역은 나에게 첫사랑 같은 곳이다. 천국보다 낯선 파리의 기억을 다정하게 채워 준. 우리는 북역의 캐리어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한결 가볍게 파리를 배회하기로 했다. 정처 없이 걷다 길을 잃어도 괜찮은 이 도시에서 카메라와 렌즈, 무거운 장비들로 가득한 3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짊어진다는 건 좀 가혹하지 않은가. 일 년 반 만에 조우한 북역은 그 여느 때보다 붐볐다. 마침 프랑스는 공휴일과 주말이 징검다리로 놓인 연휴기간이기도 했다. 오가는 사람들로 역사는 만원이다. 



투어버스를 타고 한가로이 파리와 사랑에 빠지는 이들의 모습이 유월의 청량한 신록 사이로 스쳐 간다. 우리에겐 다섯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는 모든 것이 벌써 그립다. 투어 버스는 화려한 물랑루즈가를 지나 장엄한 루브르궁을 돌고 난 뒤 반짝이는 센강을 따라 동쪽의 노트르담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서쪽의 개선문을 순회할 것이다.



지난가을, 머물렀던 숙소 앞 마르쉐도 그대로다. 아케이드 유리창 너머로 초여름의 무성한 녹음이 넘실댄다. 지난 늦가을 마주한 건조한 풍경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여름은 모두를 설레게 한다. 텅 빈 식탁에 앉아 한가로이 점심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미친 토끼마냥 시간에 쫓기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찾은 파리의 모든 것이 그립기만 하다. 흐르는 일상의 관성이 단절된 듯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 


겐트에서 펼쳐질 <KIMCHI> 프로젝트가 그토록 부담이었을까. 인천 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놓칠 뻔한 어제의 일은 실제 하지 않았던 것만 같고,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파리의 풍경은 환영처럼 스쳐간다. 유월이 시작되는 첫날, 나는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뒷걸음치려 한다. 그건 단지 태양이 뜨거웠던 탓이었을까? 북역에 도착해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나는 미리 챙겨 온 얇은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2019년, 처음으로 폭염 주의보가 발효된 초여름이었다.




북역 인근은 다국적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향신료 가게에 들러 샤프란을 사고도 싶었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중동 음식조차 간절했다. 그날따라 비건 레스토랑의 드레싱을 듬뿍 얹은 샐러드 조차 그토록 먹음직스러워 보이던지.  



초여름, 수확의 기쁨으로 가득한 가판대 위는 프랑스 전역에서 올라온 제철 채소와 과일들로 넘치는 풍요를 주체하지 못해 포화상태다. 


이대로 토마토 스튜를 끓였을, 제철 토마토를 뒤로 하고. 2019, paris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은 익숙함에 기대고 만다. 북역을 기점으로 남쪽을 향해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익숙함. 생드니가  Rue Saint - Denis 한가운데 위치한 한식 레스토랑 [Go Grill]. 점원은 우리에게 다가와 어딘가 어색한 고국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포크 대신 젓가락을 내어 주는 것은 무언의 관습이다.



텅 빈 테이블은 곧 만석이 되었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연휴 틈바구니에 모처럼 여유를 누리는 학생들, 양갈비를 굽는 중국인 관광객. 그 사이 한식에 퍽이나 익숙한 우리는 현란한 젓가락질을 뽐내며 접시를 비워갔다. 옆 테이블의 데이트를 즐기는 프랑스인 커플은 비빔밥을 비비지 않고 포크로 토핑 된 야채를 하나씩 떠먹는다. 만두와 전은 간장 종지를 스치지 않고 입으로 향한다. 곁들인 찬은 마치 하나의 완성된 요리처럼 천천히 음미한다. 익숙하고도 낯설구나. 



이대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조르즈 퐁피듀 센터가, 지난 여행에서 머물렀던 샤뜰레의 숙소가, 그 길로 반짝이는 센강이 흐르겠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이본 램버트 Yvon Lambert> 서점이 있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한다. 그러다 마주한 꽃집의 별 것도 아닌 토마토 모종에 시선을 빼앗겨 머뭇거린다. 



여기서부터는 익숙한 길이다. 마레 지구에 인접했다는 뜻이고 지난겨울 방문한 핫플레이스와 조우다. '더러운 음식과 비린내 나는 와인'을 모토로 내건 <캠 임포트 익스포트 C.A.M Import Export>. 한국인 셰프 이수가 총지휘하는 언더그라운드 감성 가득한 공간. 예술이 넘쳐흐르는 이 도시에서 이 곳은 또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더러운 음식과 비린내 나는 와인'은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맛을 추구하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제철 식재료는 그날의 현장성에 따라 즉흥적으로 탄생되고, 프랑스 전역에서 공수해온 내추럴 와인과 곁들여진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쇼윈도 너머로 맛을 삼킨다.



쇼윈도 너머에 놓인 그날의 신선한 식재료조차 하나의 설치 작품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 해가 뉘엿해지면 곧 분주하게 돌아갈 레스토랑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층층이 쌓인 예쁜 과일과 채소는 셰프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한 접시로 다시 태어나겠지.



마레지구 동쪽 끝에 위치한 <이본 램버트 Yvon Lambert> 서점에 도착했다. 이메일을 주고받은 담당자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사진집을 건넨다. 찬찬히 서점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파리로 돌아올 2주 뒤를 기약하며 서점을 나선다. 시간에 쫓기는 미친 토끼의 신세는 이토록 설레는 순간조차 축소시켜 버린다. 사진집에 대한 담소조차 나누지 못한 채 도망치듯 서점을 빠져나온 그 순간, 시계는 오후 세시를 가리켰다. 북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한다.



마레지구가 끝나는 북쪽 경계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따분하지 않은 도시. 갈라지고 페인트가 벗겨진 벽을 무대로 한 껏 솜씨를 뽐낸, 이름 모를 예술가의 그라피티 아트를 뒤로.




시계는 3시 30분을 막 넘겼고, 우리는 생 마르텡 운하에 당도했다. 여기서 북역까지 걸어서 20분 거리다. 19세기 초 구축된 수문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가교를 건너 <빌르망 가든 Jardin Villeman>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브뤼셀행 기차는 오후 4시 40분 출발이고, 북역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제하더라도 약 30분 정도 여유를 부려볼 만하다.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프랑프리에서 쟁인 생수와 견과류, 유기농 당근주스로 목을 축인다. 공원 저편에는 연휴를 맞이해 피크닉을 즐기러 나온 파리지앤들로 가득이다. 젊은 남녀가 섞여 와인 따개를 빌리며 서로 말을 트고, 젊은이와 늙은이가 세대를 초월한 이야기를 펼친다. 어린아이들은 폭염 속에서 생수통에 수돗물을 가득 채워 서로에게 퍼붓느라 쫓고 쫓기고, 독서에 빠진 누군가는 종이 사이로 펼쳐진 세계에 걸쳐 있다. 내리쬐는 태양빛에 희미한 여운을 그리던 구름은 자취를 감췄고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꼬리도 증발했다. 유월이 시작되던 첫날, 서울도 이렇게 무더웠던가? 플라스틱 생수통과 주스가 담겨있던 유리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빌르망 가든 북쪽 문으로 나온 시간은 오후 네시. 길을 건너면 파리 북역과 바로 인접한 동역이 나온다.




동역에 들어서자 웅장한 스케일의 그림이 시선을 압도한다. 분주히 움직이는 현대인과 그림 속 역동적인 군중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인 화가 Albert Herter의 <Leaving for the Front–August, 1914>의 1926년 작품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 전선을 향해 떠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공사로 늘 어수선한 역사 주변. 무심한 듯 설치된 사진 작품이 눈길을 끈다. 명실상부 예술의 도시. 



동역에서 도보로 오분 거리의 북역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후미진 골목을 따라 높은 계단을 올라 뒷길로 들어서자 역사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유럽을 잇는 대동맥이 수렴되는 파리의 심장부.



북역에 도착했다. 짐 보관소에 맡긴 캐리어를 되찾고 게이트 앞에서 플랫폼 번호가 뜨길 기다리는 중이다. 유럽 철도 시스템의 사악한 현장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이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열차 출발 5분 전이 임박해도 플랫폼 번호가 뜨지 않더니 3분을 남겨두고 40분 연착 소식을 알린다. 피로감보다 이렇게라도 파리에 40분간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안도감이 깃든다. 내가 이토록 파리를 사랑했나? 북역에 새로 들어선 <FIVE GUYS>에서 파리에 싹튼 미국 문화를 맛보고도 싶었지만 위염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PAUL>에 줄을 서 담백한 잠봉과 뿔레 샌드위치를 포장하고, <KUSMI>에 들러 겐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애진을 위해 차를 고른다. 나의 선택은 레몬 진저 티. 친절한 점원은 귀여운 샘플용 티백을 선물로 챙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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