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깨어날 시간.
2021.01.20
나는 사실 이를 꽤나 오랫동안 좋아해서 다른 누구와도 갖지 못할 추억을 많이 갖고 있다. 그 장면들이 마치 영화 같다고 자주 생각한다. 세상 누구도 다신 나에게 주지 못할 그런 감정과 경험들이라 헤어지지 못하고 사귀었다. 바람을 피워보려고 해도 만나지는게 결국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라 명목이 가장 좋은 이 사람과 이십대 절반 이상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가학적인 관계였는데.
한 번은 차가 끊겨 타야 했던 택시 안에서 기사님과 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훌쩍이며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새벽이라 텅 빈 도로에 반짝이는 가로등과 강물에 반사된 다리의 불빛이 눈물에 번져 더 뿌옇고 흐리게 보였다. "잘 맞지 않나 봐요. 불행해요." 하고 몰래 뒷좌석에서 울던 시간. 사실 이렇다 할 속상함보단 해결 못할 문제들에 내가 싫어져 울 일도 아닌데 울어버렸다. 생각해보면 그 긴 시간 동안 가스 라이팅을 오지게 당한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를 알 수 있다고 그의 주변엔 지독한 기회주의자들이나 부족한 에고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채우려는 해충 같은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내가 누구의 애인이고 말고 상관없이 그들에게 내가 도움이 될지 아닐지가 가장 중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눈앞에서 알짱대는 유흥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가 언젠가의 술자리나 언젠가의 험담의 장이 서면 써먹고자 저장해두는 것 같은 눈빛이 있었다.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가 나와 만나는 시간엔 나와만 갖는 그런 순간과 따스함이 있기에 주변 사람들이 이유가 되어 그만 둘 순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런 그의 지인들 사이에선 그와 비슷하게도 반짝거리면서도 세상에 흔치 않은 따스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그의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가 그런 친구들과 더 비슷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들은 매력적이기도 해서 반해버릴 지경이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내가 이 사람과 만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주 소수였지만. 그런 소수를 세상에서 발견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어디서 만났겠는가.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척박한 땅에서 물 한방울을 발견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때의 나에겐 강과 같이 느껴져 과장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내가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필 가능성 없는 밀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문제점은 여전했다. 가끔은 나에게서 돈을 뜯어갈 때도 있었고 매번 여기저기를 오고 가야 했던 탓에 불규칙한 스케줄로 만나야 했지만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 스트레스로 인해 나는 날카로워졌고 결국 각기 다른 병원을 전전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무슨 스트레스 받으시는 일 있으셨어요?” 라는 질문에 몇 번을 터지듯 울음을 터트렸는지 모르겠다. 힘들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병까지 얻었구나.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가 누군가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경탄스러운 일이다. 나의 수많은 상상들과 선같이 얇은 감정들을 조합해 하나의 실로 구슬을 꿴 다음,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목격될 때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권력이 내게 생긴다고 믿는다. 온전히 이해받는 기분, 아무도 꺼내지 않은 생각을 세상에 탄생시킨 기분. 무한히 솔직해져서 아무것도 바닥에 남지 않은 깔끔하고 가벼워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누군가는 우리 관계가 실없거나 이해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거기에 속해서 좋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힘듦에 나는 관계에서 한걸음 두 걸음씩 발을 빼고자 했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지냈다. 이 사람과 만나고 있다는 명목을 유지하는 것에 급급했다. 누구나 탐내고 동경하는 이와 적어도 모종의 어떤 특별한 사이라는 타이틀을 놓칠 수 없었다.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상담사를 붙잡고 한 번은 내가 매 맞는 아내가 될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꼭 그럴 것 같다고. 아무리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이런 관계에선 헤어지는 것이 맞다. 왜 몰랐을까. 떠나도 되는 관계였다는 것을. 그것이 당연했다는 것을.
저런 데이트 폭력을 당한 적이 없으니 이것은 픽션이면서도, 사실에 기반한 팩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놀랄까 봐, 또는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오해를 피하고자 빨갛게 표기해본다.
저 이야기는 친구랑 발표 나기 전에 이야기하다가 나온 대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나는 친구에게 이젠 사실 영화를 안 만들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이래서 사람들이 이혼을 하는구나."라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인 줄 너무 잘 아는 나는 바다 건너 있는 그녀에게 까지 들리도록 크게 웃어버렸다. "우리 사랑은 아직 순수한데 글쎄 시댁이 별로랄까.”
이런 생각을 해봤다. 남자라면 진작 헤어졌을 텐데. 친구와의 저 대화가 생각나서 재미로 살을 붙여서 써보았다. '영화가 남자라면 어떤 남자일까?’
어떤 생각이 들면 기승전결을 만들어 언젠간 쓸 이야기로 적립해두고, 재수 옴 붙어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엉엉 울다가도 나중엔 이 캐릭터를 가지고 영화를 써야지 하며 이상한 경험들을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적립해두는 이야기는 근 몇 년간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와는 크게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업으로 삼기엔 그를 위해 실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쌓지 않았다. 왜냐면 사실 하고싶은 것과는 다르기에. 아주 차분해진 마음으로 든 생각은, 허황된 허상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
단편을 찍으면서 내가 울며 영혼을 갈아 넣는 이 영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매번 고민했다. 사실 단편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를 극장에 거는 것은 놀라울만치 상관관계가 없다. 이 모든 것은 학부가 끝나면 사라질 환상이다. 그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만둘 순 없었다. 그 간극에 영화를 찍는 것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작업 같았다.
더 이상 오지 않을 기회에 나를 더 갈아 넣어야 하면서도 업으로 삼을 수 없기에 점점 더 놓아야 하는 그런 아이러니. 그러나 그 모순은 나에게 지독히 현실적인 것들이었기에 나는 졸업하고도 그와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지지부진한 연애담만 남긴 그 긴 시간이 이젠 -담이라는 단어로 맺음이 지어졌다. 아무래도 불합격은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과정은 거의 나를 죽일 뻔했지만 그 강렬했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나를 사랑했다. 그래서 졸업을 두려워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그 어떤 비슷한 일이라도 하고 싶어했던 본인이 이제야 보인다. 어떠한 추억과 시기들을 과거로 묻어두며 확신과 미련을 남겨둔 채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정말로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는 기분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영화를 한 것이 아니고 영화를 전공한 것이라는 것을. 그냥 저 문장이 뭐라고 눈물이 나면서도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