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담당했던 환자, 응급실에서 만났던 환자, 처음 집도했던 환자, 힘들게 수술했고 힘들게 버텼으나 돌아가신 환자,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수술이 잘 끝나 잘 회복해서 퇴원했던 환자, 합병증으로 어렵게 투병하다 퇴원했던 환자...
지금 돌이켜 보면 별문제 없이 잘 퇴원했던 환자들보다는 힘들게 치료했거나 계속 마음이 쓰였던 환자 분들이 조금은 더 오랫동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쓰라린 기억... 꺼내놓기 부끄러운 기억... 가슴 아픈 기억...
나에게도 아픈 손가락과 같은 환자들의 기억이 있다.
#1
응급실 인턴 때였다. 여느 때와 같이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환자들은 시간 가리지 않고 찾아왔고 응급실 복도마다 환자들 침대로 빼곡하게 차 있었고 침대가 모자라 의자며 보호자 대기석이며 환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럴 때 인턴들에게는 일을 해야 하는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당연히 신체징후가 불안정한 환자들이 우선이고 그다음으로 처치며, 채혈이며, 수액 라인 잡는 일... 그 사이사이 심폐소생술이 발생하면 달려가야 하고 대략 제일 마지막 순위가 간단한 소독과 같은 일이었다. 인턴들 업무 장부에 쓰여 있는 일 중 이렇게 나누어서 빨리빨리 처리한다. 하지만 일은 해도 내원 환자들이 많아질수록 다시 쌓이고 또 쌓이고 그러다 보면 가장 후순위였던 소독은 점점 더 미뤄지게 마련이다.
나 역시도 우선순위에 맞게 일 처리를 하고 있는 중간에 한 보호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 선생님 우리 아이가 히크만 카테터를 가지고 있는데 소독이 필요해서요.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응급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보호자들이 많아서 여느 때와 비슷하게 기계적이면서 사무적인 어투로 "지금 바로 해드리기는 어려울 거 같고 최대한 빨리 해 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라고 답을 했다.
보호자 옆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학생이 항암으로 머리카락이 없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잠시 스쳐지나 보내고 다시 정신없이 일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심폐소생술이 발생했다는 연락이 왔다. 지체 없이 바로 달려갔고 환자의 얼굴을 확인하니 그 어려 보이는 학생이었고 나에게 소독을 부탁했던 그 보호자는 지척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계셨다. 그 순간 옆에서 보호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아니 그 간단한 소독도 하나 못해주는 병원이 무슨 병원이냐고... 왜 이렇게 애를 방치해서 죽게 하냐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내과 주치의 선생님이 보호자를 달래며 설명하고 심폐소생술은 지속되었으나 결국 환자는 심장이 멈추고 말았다...
너무나 큰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너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할 것 같아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그 간단한 소독이라도 해드렸더라면... 그냥 조금 둘러가도 해드리는 건데...
보호자의 한 맺힌 외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독을 해드리지 못한 것이 환자가 돌아가시게 된 원인이진 않지만 아들이 아파서 응급실 내원해서 간단한 처치조차 받지 못하고 대기하는 상황에 놓인 보호자에게는 그 마저도 못해준 의사와 병원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지 지금도 가늠이 안된다.
그날의 일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늘 마음의 짐으로 자리 잡고 있고 늘 나에겐 아픈 손가락과 같다. 나에게는 아주 간단하고 가벼운 소독이었으나 그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의사라는 직업에 일의 우선순위가 있을 수는 있지만 간단하거나 가벼운 일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환자였다.
#2
반갑게 인사하시며 진료실로 휠체어를 타신 환자 분과 휠체어를 밀어주시는 보호자분이 들어오신다.
나에게 수술받고 이제 5년이 되시는 분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는 하는 암 완치라는 5년을 재발 없이 무사히 넘기셨다. 외래를 보면서 검사 결과 괜찮으시고 이제부터 1년에 한 번 뵈면 되겠다고 말씀드리고 내년에 뵙기로 하고 외래 문을 나서시는 뒷모습을 보니 기쁜 마음 한 구석에 죄송스러움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휠체어를 타시게 된 건 5년 전 수술 직후에 발생한 뇌졸중으로 신체 마비가 오신 게 원인이었다.
환자들의 수술 동의서를 작성할 때 항상 수술 후 심정지, 심장마비, 뇌졸중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나의 말속에서는 '발생할 일은 거의 없지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덜컥 수술 후에 뇌졸중이 오셨고 회복하는 중에 낙담하시는 환자와 보호자를 보며 죄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후 회복하는 동안 환자와 보호자 분과 나를 포함한 의료진이 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환자 분은 잘 버텨주셨고 보호자 분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으로 환자 상태가 안정이 되었고 한쪽 몸을 사용하실 수는 없지만 재활을 하실 수 있는 병원으로 연계하여 퇴원시켜드렸다. 이후에도 다양한 증상으로 내원하시고 퇴원하시기를 반복하였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5년이라는 시간 지났다. 항상 환자 분과 보호자 분을 뵐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겁다.
환자 분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허황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차라리 그때 그날 내가 수술하지 않았다면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었다. 그래도 힘들었던 시간에 환자 분도 보호자 분도 치료에 대해서 잘 따라와 주시고 감내해주셔서 다행히 5년이라는 시간이 재발 없이 흘러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환자 분도 보호자 분도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때 당시에는 수술한 내가 많이 원망스러우실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뵐 때마다 마음 한편에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남아있다.
내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아픈 손가락 같은 환자 분들이다.
아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 가슴 한편에 품고 있는 환자들을 하나 둘 꺼내 놓으면 아마 열 손가락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고 그중에서도 외과라는 과목을 선택한 이후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항상 좋은 결과와 쾌유를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내가 진료한 환자들에 있어서 좋은 결과도 나쁜 결과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은 많은 부분을 주치의인 내가 지고 가야 할 몫이다. 이렇게 글을 통해서 나의 마음속 응어리가 , 환자와 보호자들의 응어리가 풀릴 수 있었으면 한다. 앞으로도 더 많은 환자들이 나의 손을 거쳐갈 것이다. 나에게 더는 아픈 손가락으로 남을 환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고 환자에게 더 다가가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