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힘겨운 일상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듯한 소설
어린 시절 "베스트극장" "드라마 시티" 같은 단편극들을 즐겨보았던 기억이 난다. 매주 한 번, 유명하진 않지만 낯익은 얼굴의 배우들이 평범한듯 독특한 사연을 펼쳐내곤 했던 단편극을 기다리는 것이 한 주의 낙이였다. 근래엔 스타배우와 작가 파워에 의한 광고수익이 뒷받침되어야하는 미디어 구조 탓인지 예전처럼 단막극을 보는건 어렵게 되었지만, 장편을 소화하기엔 현대인들의 삶이 지나치게 바쁜 탓인지, 여전히 단편소설은 장편에 비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듯 하다.
본 소설을 완독하는데는 대략 1시간 반정도 소요되었는데, 책 분량이 길지않고 문장 호흡이 짧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보다는 각 이야기들이 소름끼칠만큼 현실적이기에 금방 집중해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히고 쉽게 잊혀지는 소위 snackable 컨텐츠도 아니다. 매일 우리 삶속에서 다시 상기되고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각 단편소설속 인물들은 한국의 어딘가에서 살고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해도 믿겨질만큼 현실속의 우리 주변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런 현실속 군상에 대한 가감없이 현실적인 심리묘사가 이 책이 단시간안에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게된 비결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이 초반에 관심을 모은 큰 이유중 하나는 단연컨대 작자가 30대 초반의 신인 여성작가인 점일 것이다. 근래 한국 문단에서 젊은 여성작가들이 두각을 보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류진 작가는 소위 밀레니얼 세대의 '많이 배운 흔한 수도권 직장인 여성'들을 대변하는 극사실주의적 소설을 집필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잘 살겠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도움의 손길",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새벽의 방문자들" 등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은 현재를 살고있는 30-40대 여성들의 현실속 슬픔과 고통의 저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는 소위 입시와 구직활동, 집값상승으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거나 간신히 감내해가고 있는 현 밀레니얼 세대의 고통뿐 아니라, 동시대 여성으로서의 수모를 솔직담백하게 보여준다. 특히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라는 단편은 개인적으로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심리적 반전이 느껴지는 소설이였는데, 화자인 지훈의 서술의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다 마지막에 지유가 주도권을 쥐게되는 시점에서 그간 타자의 시선에서 주로 비춰진 30대 여성에 대한 시선을 뒤집어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 부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포장하기에 따라 오랫동안 한 여자를 바라봐온 한 남자의 진실된 마음이라고 비춰질수 있는 이야기가, 사실은 그럴듯한 공식과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 '해봄직한' 긍정적 가능성을 걸어본 남자의 변주곡이였던것. 제목조차도 "나의 가이드"라니!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이였다. 전문 비평가들의 리뷰를 보면 대체로 "깊이가 떨어지는"소설이라는 평이 대세였던 것. 개인적으론 그 평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단 한번도 이런 삶의 대상이 된 적 없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본 소설의 내용을 공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점심시간 한 시간도 자기계발에 활용한다는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책 한권 읽을 시간을 내주기엔 너무 바쁜 현대인들의 삶을 고려할때, 이 단편 소설의 작은 반향은 다변화되고 있는 대중들의 구미에 의해 철저히 "읽을 거리"들이 외면되고있던 현 시대에도,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글에 대한 갈망이 존재한다는걸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극도로 현실적이면서도 세대반영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성공은 어떻게 보면 언택트 시대, 독자들의 메마른 마음을 공략할 수 있는 읽을 거리들의 부흥의 기회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