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에서 복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회의 중 동료가 말한 내용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미안한데, 한 번만 다시 이야기해 줄래요?”라고 되물은 일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한 번 듣고도 머릿속으로 요점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까지 예상했을 텐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A 업무를 하다가 문득 B 업무가 떠올라 그 일을 처리하려 했고, 다시 A 업무로 돌아왔을 땐 어디까지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의 흐름이 자꾸 끊기고, 머릿속에서는 여러 업무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의 속도가 자꾸 늦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복직 전에는 슈퍼비전 해준 내용도 선명하게 떠올랐고, 팀원들과의 대화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회의가 끝난 뒤에야 “아, 그 이야기를 빼먹었네” 하고 뒤늦게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아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해 대화가 어색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아이 하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시 퇴근을 해야 했고, 주어진 시간보다 일이 늘 많기 때문에 빠르게 일처리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일하다 보니 실수도 전보다 더 잦아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지,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그 시간이 너무나도 외롭고 힘들었다.
출산과 육아는 단순한 삶의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여성의 뇌는 이 시기를 거치며 구조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알려져 있다.
감정, 공감, 경계, 기억, 멀티태스킹과 관련된 영역에서 재조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2016년,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의 엘셀린 후크제마(Elseline Hoekzema) 박사는 출산 전후 여성의 뇌를 추적 연구해, Nature Neuroscience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뇌는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와 관련된 영역의 회백질(gray matter)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 변화는 단순한 뇌 기능 저하가 아니라, ‘아기의 요구와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돌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뇌가 기능적으로 재설계되는 과정이었다.
연구진은 이 변화가 최소 2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이나 남성, 아버지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즉, 산모의 뇌는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재구성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기억력, 언어 유창성, 멀티태스킹 같은 기존 업무 능력에서 일시적인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뇌가 ‘생존과 돌봄’에 최적화된 상태로 재편되는 동안,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잠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출산 과정 중에 뇌세포가 죽어 그렇게 된다는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소문만 들어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더 이상 자괴감에 시달리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1. 복직 사실 알리기
복직 초반에는 솔직하게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에 적응하는 중이니 양해를 구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나를 자책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 위 연구 내용을 떠올리며 나를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속은 문드러질지언정 '아이를 낳고 나니 그렇다'라고 말하며 속 좋은 사람처럼 웃어넘기며 수습을 해나갔고 동료들은 그런 나를 이해해 주었다.
2. 도구 활용하기
A 업무를 하던 중 B 업무가 떠오를 때 두 업무 중 더 급한 업무를 판단하고 미룰 업무를 메모해 둔 후 업무를 마무리해 나갔다.
업무에 대한 사항을 기억에 의존하는 대신 캘린더, 소통망에 올린 글, 메모 등을 활용하여 머릿속 부담을 줄이도록 노력했다.
3. 스스로에게 현실적인 기대치 설정하기
복직 후에 육아휴직 이전처럼 업무수행을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자주 마음을 짓눌렀다.
하지만 일과 육아를 동시에 감당하는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다른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지금은 적응기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자주 되뇌었다.
하루에 하나라도 제대로 해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이런 마음가짐이 나를 자책에서 구하고,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복직을 하게 되면서 나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내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일의 세계가, 또 다른 쪽에서는 육아의 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삶을 조율해 가며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는 나 자신을 문득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아마 이 다짐은 매일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