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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에서 K-엄마로.

by 혜윰이스트

나는 첫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일을 돕는 건 당연했고, 동생을 챙기는 건 숙명이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다잡으며 자랐던 나는, 잘해야 한다는 말 대신 속으로는 늘 이렇게 다짐했다.

“나라도 해야지.”


그 다짐은 나를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키워주었지만, 동시에 무겁고 보이지 않는 짐을 지워놓았다.

나는 언제나 조금 더 철들어야 했고, 조금 더 잘해야 했다.

그렇게 생겨난 내 안의 그림자를 나는 ‘K-장녀 컴플렉스’라 부른다.


이제는 엄마가 된 나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좋은 엄마.”

아이의 마음을 돌보고, 가족의 평안을 챙기고, 일과 가정을 동시에 붙들고 있는 내 모습.

그것은 장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나는 ‘나라도 해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며 버티고 있다.

그렇게 장녀의 무게는 엄마의 무게로 이어져, 또 하나의 컴플렉스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것을 ‘K-엄마 컴플렉스’라 부른다.


사실 그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장녀로 자란 많은 이들이 비슷한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효와 희생을 덕목으로 삼아야 했던 세대의 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가족의 중심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무게는 자연스럽게 엄마의 역할 속으로 흘러들어와, 더 큰 책임과 더 큰 완벽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완벽한 장녀도, 완벽한 엄마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미처 챙기지 못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불완전한 나를 인정할 때, 아이는 나를 통해 새로운 자유를 배워갈 수 있다는 진실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K-엄마로서 조금 더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연습을 한다.


첫째, ‘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를 바라본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대신, 나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은지를 떠올린다.

그 순간부터 삶은 ‘책임’이 아닌 ‘선택’의 색을 띠게 된다.


둘째, 멈춤을 허락한다.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잠시 멈춰 서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잠깐의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다시 나를 세우는 시간임을 이제는 안다.


셋째, 혼자보다는 함께를 연습한다.

도움을 청하고,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는 관계 속에서 나는 다시 인간답게 숨을 쉰다.

모든 걸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K-장녀에서 K-엄마로 이어지는 이 긴 여정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솔직하게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연습한다.

그게 어쩌면, 나와 우리 모두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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