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획 전시에 대한 설렘 때문에 새벽까지 잠 못 들던 연재는 해가 중천에 뜨고야 눈을 떴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고 소풍을 열고 가장 한가한 날. 전시 준비는 끝났고, 소풍이 다시 문 열기까지 이틀이 남았으며 오는 사람도, 만나러 갈 사람도 없다. 그러니 느긋하게 일어나 느지막이 밥을 지어먹고 오랜만에 호숫가를 걸어볼 예정이다.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김치밖에 없다. 간 고기를 사다 김치만두를 만들어 볼까?
혼자 살면서 만두까지 만드나 싶지만, 몸을 안 움직이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 생각을 덜 할 요량으로 몸을 움직이기로 한다. 귀찮긴 해도 만들어 놓으면 오늘은 찐만두로, 내일은 설날이니까 떡만둣국으로, 남은 건 냉동시켰다가 급할 때 먹으면 일주일도 커버할 수 있다. 당면 삶고, 볶은 고기에 으깬 두부와 잘게 썬 김치 섞어 만두피에 넣으면 완성. 막상 해보면 별것도 아니다.
귀가 달린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두꺼운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은 다음 장바구니용 에코백을 롱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찬 바람에 코끝이 찡하니 정신이 번쩍 난다. 영하 십 도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계단을 내려가 그림들이 잘 있는지 힐끔 들여다본다. 블라인드 사이로 가지런히 걸린 작품들이 보인다. 로또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일까. 든든하고 뿌듯하다.
대형마트까지 가려면 차를 끌고 가야 하는데, 살 게 많지 않으니 운동 삼아 근처 작은 마트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코를 타고 금세 폐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찬 공기는 온몸의 세포를 깨웠고 모든 감각이 피부를 뚫고 나오는 것 같더니,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마트 안은 한결 포근하다. 몸을 녹일 생각으로 천천히 둘러보며 만두피를 담고 정육 판매대에서 간 돼지고기를 사고, 과일을 살피는데 비싸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사과 한 봉지를 들었다가 가격을 보고 그대로 내려놨다. 외국 포도도, 배도 그림의 떡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먹고 싶은 과일이 비싸서 내려놓는 일은 없었지만, 사정이 달라진 지금은 최대한 아껴야 살 수 있다. 과일 못 먹는 게 아쉽진 않았지만, 내려놓은 마음이 씁쓸했다. 춥고 비싼 겨울, 더 둘러봤자 더 살 것도 아니고 두부와 양파, 대파만 장바구니에 담아 마트를 빠져나왔다.
한낮인데도 어찌나 추운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설상가상 장갑을 챙기지 않아 에코백을 든 손에 감각이 점점 무뎌진다. 양파 한 망이 꽤 무게가 있어 오른손 왼손 바꿔 들어보지만, 양손 다 꽁꽁 얼어있어 잘 펴지지도 않는다. 굽은 손을 펴며 ‘어제 이렇게 안 추운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소풍 사장님! 연재 씨!!!” 누군가 연재를 부른다. 돌아보니 해종이 식당 앞에서 장갑을 끼며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그냥 가요?” 한다.
연재는 에코백을 들어 보이며 장 봐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팔을 내리는데, 에코백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린다. 꽁꽁 언 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져 사달이 난 거다. 해종이 장갑을 벗으며 다가와 “이거 끼고 가요” 한다. 또 신세 지고 싶지 않은 연재가 괜찮다며 에코백을 두 팔로 안았다. 에코백은 들렸지만, 꽁꽁 언 두 손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검붉은 고구마 같았다. 연재가 장갑을 받지 않자 해종은 연재가 든 에코백을 가져가며 집까지 들어주겠다고 한다. 거절하기도 전에 해종이 성큼성큼 앞장서 가며.
“뭐 하시려고 장 보셨어요?”
“만두요, 김치만두”
“와, 저 완전 김치만두 좋아하는데”
“돼지고기 안 드시잖아요. 만두에 돼지고기 들어가는데”
“고기만 빼면 되죠. 김치랑 두부만 들어가도 끝내주죠”
‘나더러 만두 만들어달라는 건가?’ 연재가 속으로 생각하는데
“저도 저녁엔 요리하려고 했거든요, 배추전이요”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배추에 부침가루 묻혀서 굽기만 하는데, 그걸 왜 못해요, 근데, 또 이게 디테일이 중요해요. 배추 대가리를 칼등으로 살살 두드려 펴주고, 부침가루 물을 아주 연하게 타서 묻히는 게 포인튼데, 간단해도 맛이 기가 막히죠”
“네….” 연재가 그냥 그렇게 답하자 해종이 눈치를 살피며
“배추 전 안 좋아하시나 보다”
“아뇨, 좋아해요”
“진짜요?” 해종은 무슨 골드바라도 선물 받은 듯 기쁜 얼굴이었다.
연재는 자기가 배추 전 좋아하는 게 그렇게 좋을 일인지 의아했다.
그 사이 해종의 휴대폰이 울리고, 해종은 잠깐 나왔으니 금방 들어간다며 조금만 기다리라는 통화를 했다. 바쁜 해종의 시간을 또 뺏었구나 싶은 연재가 장바구니를 들려는데, 해종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 버린다. 어리둥절한 연재가 종종거리며 뒤따르는데, 멀리 해종이 장바구니를 소풍에 들여놓고 다시 되돌아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는 연재가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손을 흔들며 해맑은 얼굴로 연재를 스쳐 지나간다.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연재는 미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거실에 들어서 장바구니를 싱크대에 올리고 포트에 물부터 끓였다. 언 몸을 먼저 녹여야겠다. 한파가 존재감을 확실히 하는 날이다. 물이 끓는 동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뜨거운 물을 마셨다. 머릿속으로 미리 김치만두 만들 시뮬레이션 해본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것과 안 들어간 것 두 가지 버전으로.
완성된 만두 맛을 보니 기가 막힌다. 하긴 벌써 세시가 넘었으니, 타이어를 먹어도 맛있을 시간이다. 정신없이 한 접시를 비우고 나니 살 것 같다. 문제는 이 비건 만두를 해종에게 가져다주는 일. 두 차례 도움을 받았기에 만두쯤 주는 건 어쩌면 당연지사, 문제는 이걸 시작으로 이렇게 저렇게 엮일까 봐 신경이 쓰인다. 은혜 갚는 심정으로 만두만 주고 더는 역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되돌려 받을 필요 없는 일회용 용기에 만두를 쌌다. 너무 정성껏 보이지 않게,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도 않게 용기를 종이호일로 감싸고 적당히 예쁜 리본도 하나 둘렀다.
목공소에 도착하니 문은 열려있는데 해종이 없다.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연재는 조용히 만두를 놓고 목공소를 나왔다. 할 도리를 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호숫가 산책을 위해 이번엔 장갑도 착용하고 핫팩을 배와 등에 붙이고 나왔기에 아까보단 덜 추웠다. 매서운 바람이 눈에 들어가니 찔끔찔끔 또 눈물이 났지만, 머리는 더 맑아졌다.
춘하에 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니, 지난 세월이 꿈만 같다. 연재가 좋아하던 버드(bird)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새들의 분비물로 인해 하얗게 변했다. 얼핏 보면 나뭇가지가 눈에 덮인 것도 같다. 나무는 야위고 병들었는데, 새들은 그것도 집이라고 떠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검고 흰 무리의 새들이 앉아 있는 버드나무는 새들을 품느라 힘겨워 보였다. 자기 몸이 고사해 가는데도 새가 떠나지 않으면 보낼 방도가 없는 나무의 신세가 과거 자기 모습 같기도 했다.
나무를 살리라고 시청에 민원을 넣을까? 그럼 강제로 쫓겨난 새들은 어디로 가야 하지? 나무도 새도 살릴 방법은 없을까? 당장 아이디어가 떠오르진 않지만, 주민과 전문가가 모여 집단 지성의 힘을 합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텐데. 연재가 황량한 호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는데 먹구름이 끼면서 어두워졌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뭔가 쏟아질 것 같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안엔 적막이 흘렀다. 음악을 켤까, 하다가 티브이를 켰다. 이사 오고 한 번도 켜지 않았던 티브이다. 홈쇼핑과 관찰 예능, 드라마가 채널마다 나왔다.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채널만 돌리다가 결국 티브이를 껐다. 소음은 소음일 뿐, 적막을 달래진 못했다. 이번엔 음악을 켰다. 에디트 피아프 노래를 좋아하지만, 자칫 감성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유튜브 검색창에 가요를 검색했다. 가요를 들은 지 하도 오랜만이라 무슨 가요가 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인형 같은 외모의 아이돌들이 팝송 같은 가요를 불렀다. 아이돌에서 7080 가수들까지 스크롤해서 봤지만, 딱히 플레이가 눌러지는 곡은 찾지 못해 결국 핸드폰을 접었다. 사실 그보단, 머릿속이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연재는 핸드폰을 꼭 쥐고 창가에 섰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가로등 근처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쥐고 있던 핸드폰을 열어 연락처 즐겨찾기에 등록된 이름 두 개를 마침내 본다.
민준♡과 원우♡. 이름 끝에 각각 하트가 들어간 연재의 소중한 두 아들이다. 잘 지내고 있겠지? 그 일이 있고, 딱 일 년만 나한테 시간을 달라고 사정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었다.
막상 이름을 보니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하지만 참았다.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고, 그런 채로 아이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연재는 오래도록 두 이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
날마다 뜨는 태양인데 새해 첫 해돋이를 보러 간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을 그동안 연재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는커녕 유난하다고, 그런 호들갑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홀로서기 첫해를 맞아 연재도 해돋이를 볼 마음을 먹었다. 며칠 전 현이와 페인트칠하던 날, 해돋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춘하의 해돋이 명소가 대호산이란 정보를 얻었다. 한겨울에 산행 장비도 없는데 걸어서 등반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대호산은 정상 가까이 차로 올라갈 수 있고, 전망대까지 조금만 걸으면 된다기에 결정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해돋이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간절한 기원이나 각오 같은 게 있어서일 수 있다는 것. 지금 연재처럼. 그리고 그동안 연재는 해돋이 보러 갈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만큼 간절한 뭔가가 없었다는 것까지 깨닫게 되니, ‘이런 사람들은 참 한가롭거나 유난하다’라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겪어봐야 아는 상황도 있는 것이다.
추위에 대비해 완전무장하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집을 나섰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차도 꽁꽁 얼었다. 시동을 켜고 잠시 예열하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현이 달려온다. 해돋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땐 별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온 거다. 미리 전화라도 하지, 자칫하면 엇갈릴뻔했다고 하니 현은 그럴 일 없단다. 이미 삼십 분도 전에 와 있었다며. 추운데 전화라도 하지 했더니 빨리 가자고 성화다. 적군을 물리치러 가는 것도 아닌데, 현은 왠지 결연해 보였다. 보온병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 건넸다. 현은 두 손으로 컵을 움켜쥐고 한 모금 마시더니 늦으면 차 막힌다고 구시렁거린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오르는데 이 시간에도 나온 차들이 많아 산 중턱부터 막힌다. 넌 왜 산에 가려고 해? 연재가 물었다. 현은 눈을 감은 채 새롭게 다짐할 게 있다고 했다.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정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망대로 향했다. 머플러를 칭칭 감고 롱패딩을 입었지만, 새벽바람이 매섭다. 현재 기온 영하 십이 도인데, 체감은 영하 이십 도는 되는 것 같다. 현은 눈만 나오는 니트 모자를 덮어쓰고 고글까지 썼다.
아직은 해가 뜨지 않았고, 사람들은 각자 해를 보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망대로 몰려왔다. 산악회 사람들을 간발의 차이로 앞질렀기에 연재와 현이도 운 좋게 전망대 앞자리를 차지했다. 발이 얼지 않기 위해 좀비처럼 제자리 뛰기를 계속했다. 드디어 여명이 밝아오며 해가 뜨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하늘에 시뻘건 해가 떠올랐다. 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아 사진 찍는 것은 포기했다. 평소 찍사인 현도 해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추워서인지, 주변이 산만해서인지 해를 보며 하려고 했던 각오나 기원 같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로 했다. 새벽 찬 바람, 새해맞이, 붉은 해, 대호산, 등을 말이다.
해가 뜨는 것은 금방이었다. 계속 뜨는 해를 보고 있었더니 눈앞이 어른어른했다. 장갑 낀 손으로 두 눈을 꾹 누르는데, 현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