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윤희의 작업실 앞에서 기다리던 현이 손을 흔들었다. 전시할 작품은 윤희가 미리 빼 두었기에 트럭으로 옮기는 작업은 금세 끝났다. 현이 해종과 함께 트럭을 타고, 연재는 윤희의 차로 소풍으로 향했다. 윤희의 차 안, 윤희는 전시 제목을 정했는지 물었고, 연재는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로 정했다며 준비해 간 전시 팸플릿을 보여줬다. 팸플릿엔 윤희 작가의 이력과 함께 메인 작품으로 뽑은 괜너괜이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 표지에 인쇄되어 있다. 신호대기로 차가 멈추자 윤희는 팸플릿을 유심히 살피며 잘 만들었다고 한다. 윤희의 칭찬에 연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인쇄한 종이 질도 작품의 화소도 꽤 돈을 들인 모양새다. 윤희는 연재가 이렇게 꼼꼼하게 준비하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놀랐다.
연재가 미리 표시해 둔 벽에 해종이 나사못을 박았고, 차례로 그림이 걸렸다. 원래 현이 못을 박을 예정이었지만, 드릴 사용이 익숙한 해종이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작품을 걸 자리를 선정하기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비슷한 색감끼리 묶을지, 작품의 계절 별로 묶을지, 작품의 크기별로 배치할지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다. 해종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전시의 제목인 ‘괜너괜’을 안쪽 벽 중앙에 배치하고 천장에 작은 핀 조명을 달아 ‘괜너괜’을 비추자는 거다. 마치 풀꽃에 해가 비치는 것처럼. 조명을 달자 진짜 해가 비추는 것처럼 작품이 환해졌다. 이를 본 윤희가
“꽃가마에도 그늘이 있다는데, 밝은 조명이 꽃그늘까지 환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런 말이 있어요?" 현이 질문 같은 대답을 했다.
꽃가마에도 그늘이 있다니…. 순간 연재도 무슨 큰 깨달음의 언어라도 들은 것처럼 뒤통수가 저릿함을 느꼈다. 그런 연재를 보며 “그럼 제가 그늘을 없애 준 거네요” 해종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이 아니고 조명이” 현이 장난스럽게 되받았다.
연재와 해종, 현과 윤희가 2인 1조로 움직이며 벽을 채워나갔다. 몇 시간이 흘러 모든 작품이 자리를 잡았다. 윤희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보라색 벽과 그림이 제법 잘 어울렸고 양쪽 벽에 건 그림이, 중앙 거울에 비치면서 삼면이 꽃 그림으로 채워졌다. 꽃밭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재가 그림에 빠져있는데 해종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정신 차린 연재가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세 시가 넘었다. 미안한 연재가 해종에게 적당한 곳이 있는지 물었고, 해종은 당연히 있다며 앞장섰다.
해종이 간 곳은 퍼플레인으로 지난번 연재와 마주쳤던 술집이다. 아직 술 마실 시간은 아니라 가게는 비어 있었다. 술집에 웬 소고기 했는데, 안주에 당당히 한우가 있다. 넷이 앉자 휴대용 가스버너에 비스듬히 돌판이 올라가고 마블링이 좋은 소고기가 등장했다. 사장은 ‘단골에게만 제공하는 특별히 좋은 고기’라고 했다.
이게 뭐라고 현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이렇게 있으니까 직장 송년회 온 것 같아요, 전 이런 거 처음이에요” 하더니 셀카로 단체 사진을 찍는다. 젓가락을 들어 재빨리 브이를 만든 해종이
“송년회가 그렇게 감명 깊을 일인가?” 그러자 윤희가
“알바만 했으면 송년회 안 가봤을 수도 있죠”
“그런가? 연재 씨는요? 연재 씨는 가 봤어요?” 해종이 물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학원 국어 강사라고 말하면 왜 그만뒀는지, 가족들은 있는지 다음 질문들이 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현이
“형도 안 가봤지?” 말을 돌렸고
밑반찬을 들고 나온 사장이 해종을 보며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 말고 자기 짝사랑 이야기나 좀 해봐”
“에이, 자꾸 이러면 나 여기 안 와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웃는 해종이다.
연재는 자연스럽게 화살을 피했지만, 또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로 인해 편하지 않다. 일을 진행하려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상대의 마음이 상하지 않으면서 공적 관계만 유지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밥만 먹으려고 했는데, 술까지 마시면 자리가 길어지는 건 아닐까? 자기도 모르게 굳어가는 얼굴로 혼자 고립된 섬이 되어가던 그때 해종이 말했다.
“오늘은 술 마시러 온 거 아니니까 된장찌개랑 밥, 같이 주세요, 밥 먹고 빨리 들어가서 일해야 하거든요”
“저도 저녁 식사 모임이 있어 한 시간 후면 일어나야 해요” 윤희가 말했다.
연재는 바쁜 사람 불러내 일 시킨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일찍 자리가 끝난다니 안도하는 마음도 들었다. 굳었던 연재의 얼굴이 슬그머니 펴지며
“그럼 사이다로 건배할까요? 직장 송년회 처음인 우리 부매니저를 위해”
이후 작품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각자 어떤 작품이 가장 좋았는지 의견을 나눴는데 윤희는 ‘괜너괜’이 이처럼 주목받을지 몰랐고, 자기가 그렸음에도 전시의 주인공이 되니 달리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이 작품을 메인으로 뽑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때 ‘괜너괜’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연재를 봤기에 그만한 사연이 있을 거라 짐작했고, 그런 사연은 대체로 공개적이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종은 다 좋다고 했다. 특별히 하나만 고르라는 질문을 싫어한다고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등등 오직 하나만 선택하라는 질문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리곤 하나만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결정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왜 장애란 말을 뭔가를 못 하는 사람에게 붙이냐는 거다. 장애가 있는 사람에겐 명백히 2차 가해라며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란다. 연이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했다나? 좋아하는 게 많으면 사랑하는 게 많아지고, 사랑하는 게 많으면 인생이 그만큼 풍요로워진다고.
연재는 무슨 그림이 좋았냐는 간단한 질문에 이 남자의 개똥철학이 또 시작되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꼰대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말하느라 비싼 고기가 타고 있어 연재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현은 윤희에게 해종이 원래 조각을 했으며 그의 작업실에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많다고 은근히 해종을 치켜세웠고, 윤희도 해종의 작업실에 관심을 보였다. 해종은 언제나 문 열려있으니 편할 때 방문하라면서 명함을 건넸다.
조각을 전공했냐는 윤희의 질문에 해종은 미대 1학기만 다녔으니까 전공한 건 아니라며 학교를 관둔 이유에 관해서는 돈이 아까워서라고 했다. 등록금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작업하려면 돈이 또 들어가고, 생활비에 용돈까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그리고 그만큼 배우는 것도 없어 혼자 도제식 교육을 받을 목적으로 유명하다는 작가들의 조수로 들어가 일을 배웠다고 했다. 유명 작가가 해종을 쓴 이유는 일단 인건비가 저렴하고 손재주가 '쬐~금' 있어서라며 겸손을 추가한다. 조각가보단 목수가 먹고살기 쉽기도 하고 적성에도 맞다고도 했다. 생활밀착형 물건을 약간의 예술성을 보태 만드는 일이 재밌다고. 그러다 연재에게 왜 ‘괜너괜’을 메인으로 뽑았는지 물었다. 연재는 가장 마음에 와닿아서라고 짧게 답했다. 현은 연재의 꼼수를 익히 알기에 웃기만 했다.
*
소풍에 돌아온 연재는 전시실 불을 켰다. 사방은 춥고 고요한데 액자 속 꽃들은 알록달록 만발해 있다. 바쁘게 나가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액자 모서리들을 구석구석 확인했다. 다행히 긁힌 자국 없이 깨끗하다. 마른 수건으로 액자와 액자 사이 벽을 닦고 바닥도 밀대로 말끔히 닦았다. 손을 씻고 나와 전시실 한가운데 서서 디귿자 벽에 가득 찬 작품을 바라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참을 그대로 서서 작품을 바라보던 연재는 전시실 한가운데 작은 책상을 끌고 와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 화면 왼쪽 맨 위 ‘연수에게’라는 폴더를 열었다. 폴더는 텅 비어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던 연재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신연수! 보고 있니? 언니라고 해야 하는데, 또 이름 불러서 미안.
우린 연년생으로 쌍둥이처럼 자랐잖아.
그래서 언니라고 하면 난 더 거리감이 느껴져. 평소에 하던 대로 연수라고 부를게. 언니 너도 그게 편하지?
이번 전시 기획하면서 네 생각 많이 했어. 너라면 이런 공간에 어떤 전시를 제일 먼저 할까? 너라면 어떤 형태로 공간을 배치하고, 전시장에 어떤 음악을 깔아줄까?
그러다 문득 왜 진즉 너랑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며 살았다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낭만주의자인 너와 달리 현실주의자인 난 ‘만일~~ 했다면’과 같은 가정법을 싫어했는데 네가 그렇게 가고 나도 너처럼 낭만 병에 걸린 건지 자꾸 뭔가를 가정하게 돼.
만일, 진즉에 너를 강제로라도 끌고 가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면,
온몸에 암세포가 퍼졌으니 치료하지 않겠다는 널 설득해 치료받게 했더라면
네가 부모님이 반대했던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우리가 어렸을 때 내가 널 맨날 기복이라고 놀렸잖아. 꽃이 피면 꽃이 피었다고 온갖 호들갑 떨다가 엄마한테 정신 차리라고 등짝 스메싱 당하고, 비가 오면 비 온다고 우산도 없이 뛰어나가 옷 다 젖는 바람에 또 엄마한테 등짝 스메싱,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싸돌아다니다 감기 걸려 또 엄마한테 등짝을. 네 등짝은 하루도 쉬지 않고 불이 났고 난 네가 있어 하루도 심심한 날이 없었어. 사실 넌 감정 기복이 심한 게 아니라 감수성이 풍부한 거였는데.
이런 생각을 떠올리면 난 웃게 돼. 웃기면서 슬프고 슬픈데 웃음이 나와. 이게 설마 그리움? 내가 널 그리워하는 건 아무래도 닭살 돋는 일이니까 넣어 둘게. 그래도 이번 전시는 내가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니까 잘 봐 둬.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그 작품은 거기 다는 게 아니었어, 넌 그 배치가 좋냐? 대체 음악이 전사랑 어울리는 거 같아? 귓구멍이 썩었냐? 수준 하고는!” 원래 네 스타일대로 가감 없이 말해줘. 난 아주 기쁘게 네 독설을 들을 거야. 네 등짝을 공격할 타이밍을 보면서 말이야.
보고 싶다, 연수야.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가장 많이 하는 가정은….
‘만일 네가 살아있다면, 내게 일어난 일을 너에게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텐데’ 야.
끔찍하지? 죽은 너를 소환해서까지 내 고통을 줄이려 한다는 사실이 말야. 미안해, 기꺼이 내 등짝을 내어줄 테니, 맘껏 후려쳐도 돼. 근데, 정말 시간이 약인가 봐. 고통의 고자로 꺼내지 못했던 내가 고통이란 말을 꺼내며 네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이번 전시는 너를 위한 거란 말을 간단히 하고 싶었는데, 말이 길어졌어.
...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
-연수 동생 연재가.
저장 버튼을 누른 연재는 블루투스 스피커에 음악을 연결해 쇼팽의 녹턴을 재생시켰다. 녹턴과 꽃 작품은 밤하늘에 은하수처럼 찰떡이었다.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로 녹턴을 들으며 디귿자로 난 꽃길을 걸었다. 종점에 도착하면 뒤돌아 다시 걷고, 또 종점이면 또 뒤돌고......
뒤돌기만 하면 끝도 없는 꽃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