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제하는 마음에 드는 요가원을 새로 계약했고 새해에 새롭게 문을 열 예정이라 12월 26일을 끝으로 소풍과는 작별했다. 소풍도 그날에 맞춰 일주일 동안 문을 닫는다. 윤희 화백 전시를 앞두고 두 개의 벽면을 새로 칠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초보도 칠할 수 있게 페인트와 부자재가 세트로 잘 나와 있어 연재도 혼자 칠해볼 예정이다.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한 연재는 혹시라도 페인트가 묻으면 버려도 되는 옷으로 갈아입고 소풍으로 내려왔다. 언제 왔는지 현이 벽에 붙은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다.
“뭐야? 쉬라니까 왜 나왔어?”
“혼자 이걸 어떻게 옮겨요. 무거운 건 제가 옮길 테니까 매니저님은 바닥에 비닐 깔고 테이프로 고정해 주세요.”
사장님이라고 했다가 매니저라고 했다가 누가 츤데레 아니랄까 봐 말투도 시크하다. 그렇지만 이럴 땐 현이 얼마나 듬직한지 연재는 못 이기는 척 시키는 대로 했다. 인테리어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벽은 깨끗했다. 그래도 일단 수건으로 다시 닦고 롤러를 이용해 벽에 보라색 칠을 시작했다. 어렵진 않았지만 모서리까지 매끈하게 발리지는 않았다. 현이 작은 붓을 들고 롤러가 놓친 부분들을 꼼꼼히 칠했고, 둘이 힘을 합치니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칠이 끝났다. 마르고 한 번 더 칠하면 완벽할 것 같았다. 커피를 내린 현이 할 말이 있다며 잠시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아무리 냄새가 나지 않는 친환경 페인트라지만, 휘발성 물질에 눈이 시다. 연재는 환기를 위해 소풍 문을 활짝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현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심각한 얼굴로 호수를 바라봤다. 다시 소풍으로 돌아오던 날과 같은 표정이었다. 연재는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심각한 얼굴인가 싶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현은 말이 없었고, 기다리던 연재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혹시 여기 그만두려고? ”
현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은 자신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그랬다가 실망한 연재가 자신을 멀리할까 두려운 마음에 갈등하고 있었다. 제하는 굳이 병명까지 알릴 필요가 있냐고 했지만, 현은 연재를 속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찬바람에 외투도 없이 서 있던 연재가 콧물을 흘렸다. 연재는 휴지로 콧물을 닦으며
“배고픈데 올라가서 밥부터 먹을까?”
현이 거실에서 윤희 작가의 도록을 보는 동안 연재는 밥을 지었다. 오늘따라 더 추워 보이는 현에게 뜨끈한 한 끼를 먹이고 싶어서다. 무슨 얘긴지 몰라도 저리 뜸을 들이는 걸 보면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렇게나 힘든 현의 마음을 데워줄 오늘의 요리는 밀푀유나베. 만들기는 간단하지만, 눈으로도 푸짐하고 맛도 근사해 대접하는 느낌이 드는 요리다. 샤부샤부용 소고기와 배추, 깻잎을 켜켜이 쌓아 동그란 전골냄비에 동그랗게 배치하고 위에 표고버섯을 올렸다. 만들고 보니 재료들이 손에 손잡고 있는 것 같다. 모두 연결된 느낌이랄까. 전골 하나에 느낌이 과하다 싶어 연재는 픽하니 웃음이 났다.
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도록을 넘기고 있다. 연재는 이번에 전시할 작품을 포스트잇에 표시해 뒀고, 마지막 한 작품을 결정하지 못해 현에게 골라보라고 했다. 그런데 역시나 결정하지 못하고 도록을 앞으로 넘겼다 뒤로 넘겼다 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현을 보니 웃음이 난다. 뭐가 됐던 마지막 하나를 고르는 일은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먹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당장 결정 안 해도 되니 일단 밥부터 먹자고 현을 식탁에 앉혔다. 식탁에 인덕션을 올리고 전골을 끓이며 현과 마주 앉았다. 그러고 보니 소풍 오픈하고 현이를 한 번도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일만 많이 시키고 제대로 대접 한번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고맙게도 현은 진짜 맛있다며 야무지게 잘 먹는다.
연재는 현의 앞접시에 크게 한 국자 떠주며 그림 중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물었다. 현은 27페이지 그림이 좋다고 했다. 연재가 도록을 넘겨 27페이지를 펴보니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라는 들꽃시리즈 작품이었다. 연재가 처음 윤희 작가 전시에서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작품이다. 사실 그 작품을 전시 목록에 끼웠다가 막판에 뺏었는데, 현이 그걸 꼭 집다니,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한가 보다 싶다. 연재가 그 작품을 뺀 이유는 단 하나, 구매하고 싶으니까. 당장은 살 형편이 안 되고, 전시했다가 팔려버리면 영영 날아가니까 윤희 화백 작업실에 잘 넣어 뒀다가 돈이 좀 모이면 사려는 나름의 꼼수였다.
작품은 연두와 노랑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색채만 봐선 르누아르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동양 채색이 주는 청량하면서도 신비로운 맛은 르누아르의 그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도 이 그림 좋은데” 연재의 말에 현이 답했다.
“전 그림 잘 몰라요. 제목이 좋아서요”
연재는 그림을 다시 보며 속으로 제목을 곱씹어봤다. 작은 풀꽃이 관객을 향해 나 이렇게 작고 초라한데, 이런 내가 작품의 주인공이라도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현을 보니 그가 연재에게 묻는 것 같다. 현이 어떤 비밀을 차마 털어놓지도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이런 나라도 괜찮냐고. 연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괜찮지. 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연재의 눈에 핑하고 눈물이 고였다. 그건 그동안 수없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해온 마법의 주문과 같은 것이었다. 연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컵을 가지러 가는 동안 현은 코를 닦는 척하며 티슈를 뽑았다. 둘은 서로 다른 이유로 눈물이 고였고, 서로 다른 몸짓으로 눈물을 감췄다.
제사상도 아닌데 무거운 분위기로 밥 먹는 건 불법이나 마찬가지, 연재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현이 고른 그림을 전시 목록에 넣겠다고 했다. 현이 물었다. 그 그림 좋았다면서 왜 목록에서 뺐느냐고. 연재는 사고 싶어 꼼수를 부린 거라고 털어놨고, 연재의 말에 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런 깊은 계략이 도사리고 있는지 미처 몰랐단다. 이어 나름대로 계산이 있는 분이었다며 연신 놀란다. 연재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였냐며 눈썹에 힘을 줬고, 현은 무서운 분이라며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밥을 먹는다. 서로 키득거리며 밥을 먹다가 연재는 이렇게 키득거리며 밥을 먹어 본지 얼마만인가 싶었다.
밥을 먹고 2차 마감을 위해 다시 소풍으로 내려왔다. 두세 시간이면 마를 줄 알았는데, 날이 추운데 문까지 열어둬서인지 다 마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트럭을 섭외해야겠다. 윤희 작가의 그림을 공수해 올 트럭 말이다. 연재가 이삿짐센터에 포터 트럭을 알아보려는데, 현이 막는다. 목공소 형인 해종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연재는 해종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이삿짐센터에 알아보겠다고 하는데, 현이 왈, ‘형 일거리 없어 수입도 없을 텐데, 트럭 빌릴 돈 형에게 주는 게 낫지 않느냐’는 거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플리마켓 때 도마도 싸게 내놓았는데 상도덕을 생각하면 그래야지 싶다. 해종의 목공소는 걸어서 이십여 분 거리. 전화로 물어볼까 싶었지만, 소화도 시킬 겸 걸어서 목공소로 향했다.
해종은 커다란 원목 테이블 상판에 사포질 하고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누군가 통화하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낸다. 현이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하더니 연재를 안쪽에 있는 쇼룸으로 안내했다. 소풍 간판을 여기서 만들었기에 연재도 두어 차례 방문했었지만, 안쪽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거리 없다는 현의 말과는 다르게 작업 중인 작품들이 줄줄이 다음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란 벤치, 목조 테이블, 울타리, 나이테가 그대로 드러난 커다란 나무토막, 숟가락, 젓가락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허리가 긴 강아지 모양의 수저 받침대 위에 도깨비방망이 같은 손잡이가 달린 숟가락이 놓여있다. 너무 정교하게 깎아 놓아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해종의 통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보고 싶지, 진짜야. (잠시 듣다가) 뭐 먹고 싶은데?”
해종이 열린 문으로 슬쩍 연재의 눈치를 보는데 상대가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에 무슨 생각인지 이어폰을 빼더니 스피커폰 기능으로 바꾸고 계속 사포질 하며
“에이, 난 돼지는 안 먹어.”
“왜? 냄새나서”
“아니, 평생 하늘 한번 못 보고 사는 동물 불쌍해서 먹기 싫어”
“소는 괜찮고?”
“소는 하늘 보잖아”
“뭔 소리야, 넌 니 말에 논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나 에프야, 한 여사. 논리보단 직관!”
“확 에프킬라 뿌려버리기 전에 이번 주엔 꼭 와. 안 오면 에미 얼굴 다신 못 볼 줄 알아, 알았어?”
상대가 툭 끊고 나서야 해종이 머쓱하게 웃으며 어쩐 일인지 묻는다. 이에 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모레 아침 해종의 트럭을 쓸 수 있는지 물었다. 해종은 난감한 얼굴로 트럭을 새로 산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아 신생아나 다름없는데, 그 어리 디어린 것을 남의 손에 넘기긴 힘들단다. 얼굴이 화끈해진 연재가 무료로 쓰겠다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해종은 남의 손은 곤란하니 직접 운전하겠단다.
현이 해종을 향해 엄지를 세우며,
“역시 에프, 나도 에프야 형!”
해종도 엄지 세워 맞받으며 “역시 브라더!”
밑도 끝도 없이 이건 또 무슨 대화인가. 연재는 해종에게 괜한 부담을 준 것 같아 불편하다. 그래서 내키지 않으면 이삿짐센터를 부르겠다는 말과 절대 공짜로 부탁하러 온 게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해종은 충분히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왔으니 커피라도 한 전하고 가라는 해종을 뒤로하고 연재는 서둘러 목공소를 나왔다. 내돈내산인데, 이렇게 찜찜할 수가. 연재는 뒤통수가 화끈거리는데, 정작 연재를 여기까지 끌고 온 현은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신난 표정이다.
*
아침 일찍 해종이 트럭을 타고 연재를 태우러 왔다. 연재가 조수석에 오르자 해종은 급하게 나오느라 거울을 제대로 못 봤다며 혹시 자기 가발이 삐뚤어졌는지 봐달란다. 순간 연재는 당황했지만, 해종이 무안할까 봐 해종의 헤어라인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폈다. 어떤 가발인지 몰라도 진짜 감쪽같다고 생각하며 말 안 하면 가발을 썼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해종은 다행이라며 웃었다. 연재는 아무리 봐도 너무 진짜 같아 신기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보긴 무례하고 안 보자니 궁금해 힐끔힐끔 봤더니 해종은 머리를 숙이며 만져봐도 된다고 한다. 뭐 이렇게까지 싶으면서도 호기심에 머리카락을 만졌더니, 해종이 웃으며
“감쪽같죠?”
“네, 이 정도면 발모제에 돈 쓸 필요 없겠는데요?”
“자... 이제 제 얼굴 제대로 보셨으니까 출발합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해종이 출발했다.
연재는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장난이란 걸. 다 큰 어른이 이런 장난을 치다니 어이가 없다. 해종은 점퍼 주머니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꺼내 연재에게 내밀었다. 아차, 이런 건 내가 준비했어야지 싶은 연재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맙습니다, 이런 건 제가...”
“아니, 좀 따달라고요”
“!!!”
이 사람 번번이 사람 얼굴 화끈거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무안한 연재가 커피를 따서 해종에게 내밀었다. 해종은 한 모금 마시고 컵 받침에 캔 커피를 놓더니 주머니에서 한 개를 더 꺼낸다. 이에 연재가 받으며
“두 개 드시게요?”
“네” 하며 크게 웃는다. 해종의 기분 좋은 웃음에 연재도 따라 웃었다. 해종의 실없는 장난으로 어색함은 사라지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해종은 연재가 들고 온 가방을 슬쩍 보며 “ 거기 제 일당이 들어있나요?” 묻는다. 연재는 준비한 봉투를 꺼내 컵 받침 옆에 꽂으며
“트럭 사용료랑 하루 인건비 넣었어요”
“제 인건비가 얼만지 아시고….” 또 당황한 연재가 가까스로 침착을 유지한 채
“... 얼마인데요?”
“제가 조각하는 목수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대신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긴장한 연재가 마른침을 삼키자, 해종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멈췄다.
무안한 연재가 정색하고 되물었다.
“제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계산해 버렸네요. 금액을 알려주시면 제가 다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진지한 얼굴로
“전요, 물건은 만들어서 팔지만, 이웃 사람 일 도와주면서 돈 안 받아요.”
“그럼 제가 불편하죠.”
“제가 연재 씨 일 도와주면서 제 마음까지 불편한 건 어떻게 생각해요?”
순간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친절을 받았다가는 또 갚아야 하고, 갚으면 또 갚아야 하는 친절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타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의 친절을 거절하기엔 지역사회와 관련한 관계에 선을 긋는 느낌이라 이것도 아닌 것 같다. 고민하던 연재는
“그럼 이 돈으로 소고기 먹어요. 일 끝나고 다 같이”
“소고기요?”
“네, 돼지는 안 드시잖아요. 하늘 못 봐서 불쌍해서”
“아….” 해종은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연재는 궁금했다. 진짜 돼지를 안 먹는 이유가 하늘을 못 봐서인지. 해종은 땅만 보며 걷는 사람, 땅만 보며 사는 동물에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생명체는 조금도 해 하고 싶지 않은 개똥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연재는 그의 개똥철학이 알 듯 말 듯했다. 소나 개는 안 불쌍하냐고 더 묻는 건 채식주의자에게 식물은 생명 아니냐고 따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에게 하늘과 땅은 어떤 의미일까? 연재는 그의 개똥철학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