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하필 연재 옆에서 단체로 온 산악회 사람들이 “해피 뉴 이어”라고 크게 외치는 바람에 주변이 어수선했다. 이어 그들 중 한 명이 샴페인을 마구 흔들더니 자기 일행을 피해 연재 쪽으로 몸을 돌려 뚜껑을 열었다. 뻥 소리와 함께 폭탄 같은 샴페인이 연재를 덮치더니 그 잔재가 연재의 패딩에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도 샴페인을 딴 남자는 크게 웃으며 닦아줄 생각도 없고, 미안하단 말도 없이
“아니, 왜 하필 거기 서 있어서 샴페인을 맞아요?”라며 키득거린다.
현이 눈만 나오게 쓰고 있던 니트 모자를 벗어 연재의 옷을 닦으며
“여기서 샴페인을 터트리면 안 되죠! 그리고 터트릴 거면 그쪽으로 터트려야지 왜 이쪽으로 터트립니까?” 이미 취해 얼굴이 시뻘게진 남자가 현이 앞으로 위협적으로 다가서며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나이도 어린 게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어른한테. 넌 부모도 없냐?” 삿대질까지 하며 요즘 일일 연속극에도 나오지 않는 후진 대사를 쳤다.
“그럴 수도 있다뇨? 잘 못 하셨으면 사과하셔야죠!” 현이 물러서지 않자 엄청 귀찮은 표정으로 “그래, 미안하다. 됐냐?”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연재는 현을 말렸다. 이미 만취된 그들과 말해봤자 통할 리 없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얼굴 뻘건 남자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한다. 그러자 뻘건 남자는
“에이 새해 첫날부터 재수 없게.”라며 침을 퉤 뱉는다.
“뭐? 재수가 없어? 누가 재수가 없는데?” 열받은 현이 발끈하자 이 남자 검지로 현의 가슴을 툭툭 밀며
“야! 너 조울증이라며. 미친 새끼가 병원에나 있을 것이지”
순간 연재가 이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남자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남자의 반격으로 해돋이 전망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경찰차가 출동했고, 모두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
경찰서에 연재와 현이 나란히 앉아 조서를 꾸몄다. 연재는 입술이 찢어져 입가에 피가 말라붙어 있고, 현은 맞는 연재를 온몸으로 막느라 패딩은 찢기고 얼굴과 손등엔 피멍이 들어 연재보다 더 만신창이다. 얼굴 뻘건 남자는 멀쩡한 얼굴로 연재가 먼저 때렸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경찰이 물었다.
“먼저 때린 것 맞아요? 왜 때렸습니까?”
“저분이 먼저 저희 직원에게 폭언을 했습니다.”
“ 야, 내가 언제 폭언을 했어? 미친놈한테 미쳤다는 데 폭언이야? 형사 양반! 저놈이 지 입으로 조현병이라고 했다니까요!”
“조현 아니고 조울입니다!” 연재가 낮고 정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현이나 조울이니 미친 건 마찬가지지! 안 그래요?”
경찰이 벌건 남자를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거 참, 말씀 가려하십시오! 아실만 한 분이 새해 첫날부터 술 드시고 그러면 안 되죠”
‘민중의 지팡이가 선량한 시민 편을 안 들고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냐?’라고 소리치는 남자와 당신도 잘한 것 없다는 경찰이 실랑이하는 동안 연재는 그 남자의 언어에서 구린내를 느꼈다. 좀 만 더 있으면 ‘당신 월급 내가 내는 세금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치의 빗나감 없이 정확한 워딩을 구사했다. 다음은 설마 ‘내가 누군지 알아? 경찰 서장 나오라고 해?’는 아니겠지, 했는데, 역시나 다. 이건 교과서에 나오는 진상의 법칙인가 생각하며 경찰과 진상의 2차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재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이 앞을 다퉈 솟아올랐다. 현이 동아줄 같다고 생각했는데, 썩은 동아줄이었던 걸까? 혹시라도 조증이 심해지면 소풍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아닐까? 만일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내가 현이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주중에는 현에게 문제가 생겨도 내가 커버할 수 있으니까 주말 장사는 접으라고 해야 할까? 새로운 알바를 구해야 하나? 생각의 마라톤만으로도 숨이 차 한숨을 크게 내쉬고 현을 봤다.
현은 굳은 얼굴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정작 사건의 시발점인 남자는 고개를 쳐들고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어필하느라 안 그래도 벌건 얼굴이 숯덩이로 그러데이션 되는 데 반해 현의 얼굴은 창백했다.
순간 연재는 해종의 말이 떠올랐다. ‘땅만 보는 생명체는 어떤 해도 가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개똥철학이. 땅만 보는 사람은 절망한 사람, 숨만 쉬기도 버거운 그에게는 어떤 해도 가하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대체 이 상황에 난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거지? 실체도 없는 두려움을 애써 미리 만들고 대책을 세우느라 피 흘리는 저 실체를 삶에서 배제할 궁리만 하고 있다니. 진상 남자와 자신이 다를 게 없다고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얄팍한 속을 들키기까지 할까 봐 연재는 현의 시선을 피했다.
다치긴 연재 쪽이 더 많이 다쳤고, 쌍방 폭행이라 서로 합의를 보는 걸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경찰서를 나와 택시를 잡았다. 전망대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다. 택시에 오른 연재와 현은 각자 창밖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하자 해는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재가 세워둔 차 쪽을 향해 가는데, 현은 홀로 전망대를 향해 걸었다. 주차장에서 멍하게 현을 바라보던 연재도 현의 뒤를 따랐다. 전망대에는 아침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구름에 가려져 노을 없는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현의 눈동자에 공허함이 가득했다. 현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두 손을 만지작거린다.
연재가 지긋이 바라보자 “진작에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번엔 고개를 숙인다.
연재는 현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미리 말 안 한 게 잘못인가? 그럼 난 지방간이 있다고, 혈압이 좀 낮다고 구직할 때 말할 것인지 생각해 보니 아니다. 그렇다면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무죄. 지금 현이 조울병으로 인해 소풍에 해를 끼치고 있는가? 이건 반반이다. 현이 덕에 잘 굴러가기도 하고, 현의 무단결근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으니까. 아니 더 솔직히 현이 덕이 더 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앞으로도 무단결근과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져 일에 차질을 줄 수 있다는 것과 혹여라도 공격적인 성향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지 그게 문제인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단죄한다는 것도 부당하다. 그럼, 사과할 일도 고개를 숙일 일도 없다.
“난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더 궁금해”
“네?”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미리 말 안 한 건 나라도 그랬을 거 같고, 네가 앞으로 소풍에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더 궁금하다고” 현의 공허한 눈에 순간 빛이 돌았다.
“그러니까 저는 소풍에서… 잘하고 싶은데….”
“됐네! 그럼, 우리 새해 계획 세운 거다! 잘하기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네!!! 제가 진짜 잘할게요. 앞으로 나노 단위로 시간을 쪼개 프로그램을 만들고 어쩌고 저쩌고….” 현의 목소리가 하늘 높이 날아갔다. 현을 보며 연재는 생각했다. 현은 충분히 능력 있고 성실하니까 일단 치료부터 받게 하고 치료가 끝나면 언제라도 받아줘야겠다고. 받아 주는 게 아니라 회복하면 꼭 다시 와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연재가 계획을 세우는 현을 보며
“세부 계획은 내려가서 세우면 안 될까? 춥고 배고프다. ”
현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하필 기가 막힌 두부 요리 집을 안다고 했다. 삼대째 손두부 집이란다. 새해 첫날 해돋이 보러 갔다가 ‘경찰서’에 ‘두부’라니, 이런 기막힌 전개에 연재는 맛도 보기 전에 기가 막혔다.
새해 첫날, 다들 경찰서를 다녀왔을 리는 없을 텐데, 삼대째 손두부 집엔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두부전골을 주문했고, 현은 손을 씻고 오겠다며 화장실에 갔다. 연재는 물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았고 밑반찬으로 모두부 두 점이 나왔다. 손 씻고 온 현이 한 개를 집어 연재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매니저님!”한다. 무슨 날벼락같은 하루인가 싶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고 피가 말라붙었던 입술이 벌어지며 날카로운 통증이 왔다. “그래, 부매니저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미소를 보내는데, 현이 냅킨을 건네며 입가에 피난다고 한다. 냅킨을 건네는 현의 손에도 피멍이 가득했다. 연재는 냅킨을 받으며 생각했다.
‘액땜한 거라고. 이제 너도, 나도 더는 나쁜 일이 없을 거라고.’
숟가락을 입에 넣을 때마다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아팠지만, 종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터라 피가 나든 말든, 일단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입가 통증 때문인지 맛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지만, 허기 때문에 전골을 순식간에 흡입했다. 현은 연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웃지 마, 웃으면 더 찢어진단 말이야.”
식사를 마치고 현의 집까지 연재가 태워주었다. 운전하던 연재가 슬쩍 옆을 보니 현은 핸드폰에 뭔가 메모하고 있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관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적는다고 했다. 연재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 손목 말야,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돼?” 식당에서 현이 연재에게 냅킨을 건네줄 때 연재는 봤다. 현의 손목에 그어진 몇 가닥의 실금을. 현이 늘 긴팔로 손목을 가리고 있어 그동안 보지 못했는데, 손을 씻느라 살짝 소매를 걷었기에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현은 덤덤하게 그동안 몇 차례 자살 시도가 있었다고 했다. 연재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일상의 대화처럼 뭐가 제일 힘들었는지 물었고, 현은 고립이라고 했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데, 혼자만 섬에 갇힌 것 같았다고. 일하다가 자기 병에 대해 알게 되면 업주들은 하나 같이 낫고 오라고 했다. 병 다 낫고 오면 다시 받아 주겠다며. 그러나 한번 업장을 나오면 끝이라고도 했다. 다 낫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평생을 조절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다 낫고 오란 말은 오지 말란 것과 똑같다고 말하던 현이 메모하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혹시 사장님도 그런 생각이에요? ”
“!!!!....”
허를 찌르는 현의 기습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순간 머릿속이 까맣게 엉켰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무지로 인한 얕은 속이 드러날까 봐, 아니 그것 때문에 현의 마음이 다칠까 봐 서둘러 아니라고 했다. 연재는 현이 진심으로 연재의 대답을 받아들이는지 신경 쓰여 현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현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이 흘렀다. 안전벨트를 푸는 현을 보며 연재는 미안하다고 했다. 현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싶은 얼굴로 연재를 봤다.
“... 나 보호하려고 많이 맞았잖아. 그리고 그 아저씨가 했던 말 신경 쓰지 마”
“사장님도 저 보호하려고 그 새끼 때렸잖아요. 진짜 멋있었어요. 든든하고.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떠드는 소린 저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씩씩하게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현의 뒷모습에서 깊은 서러움 같은 것이 보였다. 현의 패딩에 묻은 얼룩과 찢긴 자국이 서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린 나이에 저런 무게의 돌덩이를 어깨에 올리고 사는 삶은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현을 내려주고 오는 길, 연재는 현의 어깨에 올려진 돌덩이와 자기가 지고 있는 돌덩이의 무게를 생각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겪은 일은 특별하다는 환상, 아무도 나만큼 아픈 사람은 없다는 착각” 속에 빠져 내 상처를 키우고 확대하고 심지어 극진히 보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패딩에 묻은 흙처럼 털어버리거나 정 안되면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 고이 모셔 두었다는 것을. 그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고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다는 것을.
갓길에 차를 세운 연재는 억지로 구역질했다. 가슴속 뜨거운 쓰레기를 토해내려는데 되직한 밀가루 반죽 같은 그것은 올라오다 말고 목구멍에 꽉 막혀 캑캑대기만 했다. 토해내고 싶다. 토해내야 한다. 살라면 손가락을 입에 넣고라도 토해야 한다. 정작 나와야 하는 진득한 그것 대신 연재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라니의 울음 같은 참혹한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