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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May 01. 2024

꽃은 그냥 피지 않는다. 한겨울을 견뎌야 비로소 핀다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집에 돌아온 연재는 일정표를 폈다. 현재 소풍 상황을 보면, 윤희 작가 전시, 지금까지 해오던 프로그램과 1월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프로그램, 작가 초청 강의, 카페, 주말 브런치까지 제법 빡빡하다. 현이 쉬는 날은 월, 화. 그때를 이용해 일주일에 한 번 정신과 상담하러 간다고 했으니, 이때를 대비해 알바가 더 필요하다. 당장 구직 사이트에 알바 구인 광고를 냈다. 그리고 포털에 조울병을 검색했다.     

 

많은 정보가 있었고, 실제 겪는 사람들의 고충이 드러난 글도 많았다. 현이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병에 관해 알아야 할 것 같아 정신과 의사가 써 놓은 글부터 읽기 시작했다. 연재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달랐던 점은 조증과 울증이 하루에도 여러 번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주기가 있다는 거다.  

    

대체 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재가 도울 점은 어떤 것일지,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병에 관해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 질병을 앓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란 걸 느끼며 노트북을 덮었다. 새벽 세 시가 넘고 있었다.     


                            *     

아침부터 연재는 분주하다. 오늘은 전시가 시작되는 첫날, 터진 입술 자국에 연한 립스틱을 발랐다. 상처가 가려지지 않지만, 안 바른 것보다는 낫다. 어제저녁에 먹은 두부가 아직도 그득한 느낌이라 아침밥은 거르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외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던 연재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소풍 입구에 서 있는 나무에, (현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든다고 전구를 달았던 그 나무에) 정 사각형 모양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라고 쓰인 현수막엔 메인으로 선정한 그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     


어젯밤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없었는데, 누구지? 놀란 연재가 나머지 계단을 내려오는데, 호숫가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현수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현수막은 원작보다 색감은 흐릿한데, 그래서인지 모네의 그림 느낌이 났다. 소풍은 이미 열려있었고, 그 안에서 선글라스에 손가락이 나오는 장갑을 낀 현이 바닥을 닦고 있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감격한 연재의 질문에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어? 그럼 누구지?”

“해종 형이요”

“목공소 사장님?”

“네, 어젯밤에 형이 현수막 제작했다고 아침에 같이 걸자고 전화 왔었어요”

“이걸 아침에 걸었다고?”

“좀 전에 걸고 형은 바쁜 일 있다고 가셨어요”

연재가 이걸 어떻게 제작했을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작품 파일 작가님께 직접 받았다고 하던데요?”

또다시 연재의 난감한 표정을 읽은 현이 자기 때문에 해종이 만들어 준 거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한다. 현은 퇴근하고 종종 해종의 목공소에 들러 조수 역할을 했다며 그것에 대한 보답이니 연재가 가질 부담은 아니라며 열심히 바닥을 닦는다.     

“근데 그 선글라스 계속하고 있을 거야?”     

현은 선글라스를 반쯤 내리며 괜찮냐고 물었다. 현의 눈가에 퍼런 멍이 번져 있었고, 연재는 얼른 다시 끼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라니, 처음엔 자연스럽지 않게 보였는데 스타일 좋은 현이 저러고 있으니 나름대로 느낌 있다. 손가락 상처에도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반창고를 붙였는데, 그것마저 패션으로 보였다.     


현수막을 보니 사방은 겨울인데, 소풍에만 봄이 온 것 같다.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전시회 배경 음악으로 비발디 사계 중 봄을 틀려고 생각했는데, 현수막을 보니 모차르트의 가곡 ‘봄을 기다리며’가 떠오른다. 발랄하고 화려한 비발디의 곡보다 다소곳이 봄을 기다리는 느낌의 모차르트 곡이 ‘괜너괜’과는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현에게 두 곡을 들려주며 어떤 게 더 전시와 어울리는지 물었다. 심사숙고의 시간이 흐르고 현도 모차르트의 손을 들어줬다. 어차피 전시 날짜가 길어 날마다 바꿔가며 곡을 틀 예정이니 큰 상관은 없었지만, 느낌이 통한 것 같아 손을 들어 하이 파이브를 했다.   

  

전시장에 “봄을 기다리며”를 조용히 무한 반복되게 틀어놓고 서둘러 2층 소풍 3실로 올라갔다. 3실은 전시장 위쪽에 있고 연재의 집은 카페 2층이라 입구도 반대편에 있고 서로 독립된 공간이다. 소풍 3실은 그동안 수요가 없어 닫아 놓았는데, 전시로 인해 오늘부터는 모든 수업은 이곳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연재는 미리 온풍기도 틀고 화장실 비품도 점검했다.

  

곧 퀼트 팀이 올 시간,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 내심 떨린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게 난초 화분이 왔다. 보낸 사람은 혜진. 전시를 축하한다는 분홍 리본이 달린 서양란 화분이다. 한겨울인데도 온실에서 곱게 자랐는지 꽃이 만발한 이 난은 이름도 품격 있는 ‘엘레강스’다. 고맙게도 축하 화분까지 보내주다니.      


전시장 입구 테이블에 ‘엘레강스’를 올려두었다. 동양의 야생화와 서양란이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린다. 사람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그냥 사람이면 되는 것을 동과 서, 흑과 백, 빈과 부, 자꾸 차별성을 강조하며 선을 긋는다. 인간은 타인을 소외시키면서 쾌감을 느끼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연재의 생각이 산으로 갈 무렵 혜진이 시우가 탄 유모차와 함께 도착했다. 열흘 남짓 안 봤을 뿐인데 몇 달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다. 연재는 시우를 번쩍 들어 안았다. 안 본 사이 시우는 더 똘망똘망해지고 몸이 꼿꼿해졌다. 순두부처럼 뭉글거리고 말랑거리던 몸에 들썩들썩 힘이 들어간다. 시우와 눈을 맞추고 혀 짧은 소리로 잘 있었는지, 맘마는 먹었는지 묻는 연재를 보며 시우는 대답 대신 침을 흘렸다. 손수건을 꺼내 침을 닦으려다 시우의 앞니가 올라온 게 보였다. 작고 하얀 보석 같은 이가 연한 잇몸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봄이 오면 새순이 돋는 것처럼 이가 날 때가 되어 이가 올라오는 게 당연한데,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경이롭다.      


어린 시절엔 매해 피는 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꽃구경 간다고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니라 한겨울을 견디고 피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꽃은 그냥 꽃이 아니라 경이로운 꽃이고, 그 꽃을 보기 위해 기꺼이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것에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가지는 특권이자 삶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시우와 근황 토크를 마친 연재가 그제야 혜진에게 화분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현이 시우의 유모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3실로 옮기기 위해서다. 혜진은 카페에 외투를 벗어놓고 전시회장을 둘러본다. 연재가 시우를 안고 혜진의 뒤에 섰다.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던 혜진이 ‘괜너괜’ 앞에 걸음을 멈췄다. 한참 그림을 보더니 연재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다. 쓸쓸함을 담은 미소였다. 혜진의 눈가에 뭔가 맺힌 것 같았는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정확 치는 않았다. 다만 혜진이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도록 두고 싶어 연재는 조용히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시우를 안고 창가에 서서 밖을 보니 나머지 퀼트 멤버들이 현수막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트럭이 도착하고, 기사가 커다란 화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다. 이번엔 제하다. 낯선 도시에 온 지 6개월 남짓 흘렀고, 그사이 연재가 한 거라곤 돈 받고 장소를 빌려준 것밖에 없는데 두 여자에게 이런 다정함을 받다니, 시우를 안고 있어서인지 두 여자의 다정함 때문인지 가슴이 따뜻했다.     


퀼트 팀이 전시 관람을 마치고 모두 3실로 올라가고 전시회를 찾는 첫 손님 둘이 등장했다. 중년의 여자들은 입장료를 물었고 연재가 무료라는 답을 하려는데, 현이 먼저 진시 관람은 무료이나 음료 주문은 1인 1잔이라고 답했다. 손님은 흔쾌히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현은 전시 관람이 끝나면 준비해 주겠다며 계산부터 했다. 사람들 말마따나 땅 파서 장사하는 것 아니니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한데, 연재는 이 당연함이 어색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마인드로 사업하겠다고 덜컹 일을 벌였다니 스스로도 용기가 가상하다 싶다. 오후에는 더 많은 손님이 전시회장을 찾았다. 전시를 본 사람들이 카페를 차지하니 금세 만석이 되었다. 카페 문을 열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 또 다른 무리의 전시 손님이 들어왔고, 전시장에서 나온 손님들이 앉을자리가 없다. 난감한 순간, 연재는 '원하시는 분은 음료를 들고 전시회장에 다시 들어가셔도 된다'고 했다. 작품에 손상 가지 않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페 손님 반이 마시던 음료를 들고 일어선다. 현이 놀란 눈으로 연재를 봤다. 연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그저 임기응변만은 아니다. 전시에 갈 때마다 커피를 마시면서 전시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성에 의해 미처 실행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번 해보고 싶어졌다. 만일을 대비해 보험도 들어 두었으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시장에 온 손님들도 음료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전시를 볼 수 있어 더 좋다고 했다. 물론 작품이 오염되는 위험도 있지만, 누군가 일부러 작품을 훼손할 작정이 아니라면 그럴 위험은 낮은데,  지레 겁먹어 너무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윤희 작가가 자신의 SNS에 올린 전시 홍보와 소풍 홈페이지, 소풍을 이용한 사람들의 각종 SNS 홍보로 꽤 많은 사람이 몰렸다. 연재가 주문받고 현이 음료를 만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빈 컵을 설거지하고 틈틈이 전시장을 순찰하고 누군가 바닥에 쏟은 커피를 밀대로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느라 말 그대로 손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아침에 분명 바짝 묶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도록 몰랐다.  

    

테이크아웃 손님이 아니면 도자기 컵을 쓰자는 게 연재의 원칙이다. 그깟 종이컵 몇 개 아낀다고 지구를 구하진 못하겠지만, 몇 개 더 버림으로 자연이 파괴됨에 손을 보태고 싶지 않다. 밀린 컵을 씻고 있는데 수찬 씨가 왔다. 오늘 기타 수업이나 있나? 정신이 혼미한데 수찬이 구직 사이트에서 알바 공고를 봤다며 일하고 싶단다. 그 말을 들은 현이 연재가 오케이 하기도 전에      

“형, 그럼 빨리 설거지부터 해줘. 매니저님은 여자 화장실 휴지 없대요, 빨리요”     

연재는 휴지를 들고 달렸고 돌아오니 수찬이 설거지하고 있다. 곧바로 3실로 단숨에 올라가 환기하고 책상 정리, 화장실 정리하는데 켈리 그래프 회원들이 들어선다. 카페에 손님이 많아 음료 주문을 못 했다고 투덜대는 회원들에게 즉석에서 음료 주문을 받아 카페로 내려왔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마친 수찬은 조심스레 선약이 있다며 알바는 내일부터 해도 되냐고 묻는다. 얼렁뚱땅 수찬 씨가 단기 2달 알바로 낙점되었고, 수찬 씨는 앞치마를 두른 채 뛰어나갔다. 약속 시간에 많이 늦은 모양이다.     


6시가 되고 마지막 손님이 소풍을 나가자마자 연재와 현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현은 핸드폰을 꺼내 매출 전표와 부지런히 맞추더니 음료 판매 금액이 98만 원이라고 했다. 이만 원 부족한 백만 원이라니, 연재는 웃음이 나왔다. 돈 버니까 좋았다. ‘어제 액땜을 제대로 했나 보다’라며 현이도 웃는다. 마음은 좋은데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종종거렸더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다행히 연재에겐 미리 만들어 두었던 비장의 무기, 만두가 있다. 설날 먹으려고 사 두었던 떡도 있으니, 떡만둣국을 먹으면 되겠다. 혹시 현에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대답보다 먼저 일어서며 만두 많이 넣어 달란다. 소풍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올라와 2인분의 육수를 끓였다. 누군가와 한참 통화하던 현이 제하 누나가 와도 되는지 묻는다. 당연히 되고 말고, 연재는 얼른 육수를 더 부었다. 잠시 후 제하가 도착했다. 현이 문을 열어주자,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낀 현을 보며      

“그 몽타주 뭐냐?”

이에 지지 않고 현이 단발로 머릴 자른 제하를 보며

“누난 안톤 쉬거야?”

“그게 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주인공! 사진 들고 가서 똑같이 해달라고 했어?”

“이게 진짜 죽을라고, 관 짜 줄까? ”

현실 남매의 다정한 대화를 들으며 연재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제하가 현이에게

“편의점 가서 맥주 좀 사 와”

“싫어, 힘들어” 현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은 제하가 카드를 내밀며

“기네스 두 개랑 아사히 두 개”

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드를 들고나갔다. 거실 유리창으로 현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제하가 연재에게 다가와 정색하고 물었다.     

“현이 얼굴이 왜 저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정색한 제하의 얼굴에 연재는 떡만둣국을 뜨려다 국자를 내려놓았다. 정색을 넘어 결연하기까지 한 제하의 눈빛은 '맞고 온 동생 복수하러 온 싸움 잘하는 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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