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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un 12. 2024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라면, 이게 바로 예술!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연재가 돌아온 소풍엔 활기가 넘쳤다. 연재의 부재를 채워준 수찬을 정식으로 고용해 부매니저로 임명했다. 현이는 매니저가 되었고, 얼결에 연재는 대표가 되었다. 직원 세 명에 대표라니 낯간지럽긴 했지만, 현이 사장님보단 낫다며 대표로 부르자고 했다. 카페 한쪽 바닥에 얼룩으로 물든 ‘괜너괜’이 세워져 있었다. 조명을 받던 몸이 한순간 커피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놓인 신세가 된 것이다. 현의 말에 의하면 윤희가 카드 결제를 취소해 그림값을 되돌려 줬고, 다른 작품들 철거해 가면서 ‘괜너괜’ 폐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그리고 연재가 없는 동안 수입과 지출을 표로 만들어 보기 좋게 내밀었다.     


윤희와는 팔린 그림 금액의 20퍼센트를 공간 대여료로 받기로 했었는데, 윤희가 지급한 금액을 보니 혜진의 그림값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환불했으니 팔린 건 아닌데 아마도 그 사달이 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팔린 금액으로 포함해 대여료를 지급한 것 같다. 이 문제는 윤희와 만나서 풀어야 할 것 같아 일단 그대로 뒀다. 전시 기간에는 카페 매출이 급증했는데, 3월은 특별한 전시가 없어선지 평달 수준으로 돌아왔고, 대신 종이공예, 프랑스자수 수업이 추가되어 전체 매출은 늘었다.   

  

연재는 작품을 어디에 걸까 고민하다가 카페 계산대 뒤 벽면에 걸었다. 얼룩진 그림도 괜찮냐는 현의 질문에 연재는 작품 이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 비록 말끔한 상태는 아니지만 얼룩도 그림의 아름다움을 다 감추진 못했다. 오히려 얼룩진 그림이 제목과도 더 찰떡같고, 연재 자신과 더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릇 작품의 가치는 보는 사람의 시선에 있는 법, 연재 눈엔 얼룩진 꽃도 괜찮은 꽃이다. 혜진을 뺀 퀼트 팀은 여전히 소풍을 이용했지만, 혜진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퀼트 팀들도 혜진의 행방을 모르는 눈치였다.      


연재는 화원에서 꽃모종을 사다가 정원에 심었다. 본격적으로 봄이 오기도 했고, 꽃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고 보니 진짜 꽃을 들이고 싶어서다. 정원 모퉁이마다 다른 콘셉트의 꽃동산을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 먼저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데, 봄에 올라오는 풀은 잡초도 이뻐서 뽑아내기 쉽지 않다. 이름이 잡초라서 잡스러운 느낌이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연둣빛 싱그럽고 상큼하기까지 한 예쁜 풀이다. 여리여리 이쁘기만 한데, 이름에 ‘잡’이 들어가니 부르기 왠지 미안하다. 들풀이나 야생풀이라 칭하면 어떨까, 싶었다.     


클로버와 들풀들을 꽃 심을 자리만 골라내고 그 자리에 수선화와 튤립을 심었다. 자연에 자연을 추가했는데도 생각만큼 조화롭지 않았다. 게다가 보는 사람마다 왜 잡초를 그냥 두느냐, 금낭화는 이쪽으로 수수꽃다리는 저쪽으로 심어라, 차라리 꽃잔디로 전체를 덮어라, 훈수가 많다. 연재는 사람들과 시시콜콜 이런 이야기 나누는 게 재미있다. 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이 불편하고 남의 일에 ‘별꼴이다.’ 싶었을 테지만, 이런 게 다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걸 보니 단절되고 뾰족했던 마음 대신 함께할 동그란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사이 가닥이 잡혔다. 먼저 왼쪽 모퉁이, 토끼풀은 적당히 골라내고 꽃잔디와 애기똥풀, 며느리밥풀꽃으로 꾸민 소박미가 있는 꽃밭을 만들었고, 오른편엔 수선화로 채우고 엉성해 보이는 곳에 키가 조금 더 큰 수수꽃다리와 황매화를 심으니 잘 가꾼 정원 느낌이 났다. 식물을 만지고 흙을 만지는 동안 마음도 식물처럼 순해지는 것 같았다. 뭐든 자기가 직접 만든 건 소중한 법, 연재도 틈만 나면 이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매니저가 된 현은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현을 겪으며 연재도 깨달은 게 있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진 사람을 가족이나 한 사람이 품는 건 분명 한계가 있었다. 하루 이틀 아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기에 제하의 말처럼 사회가 품어주는 게 가장 좋은 치료다. 물론 연재는 안다. 현의 상태가 극심할 때 그를 만났다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중요한 건 정신적인 질병이 있다고 무조건 배제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줘야 건강하게 사회가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상 비정상은 유리처럼 연약한 것이어서 한 번 삐끗하기만 하면 누구나 그 경계를 넘어가기 쉽다. 지금 정상이라고 평생 정상이라고 장담할 수 없단 얘기다. 내가 쓰러질 때 손잡아 줄 누군가 필요하듯 지금 넘어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다.   

   

연재는 그동안 고생한 현과 수찬을 위해 회식을 준비했다. 밖에서 근사한 저녁을 사고 싶었는데 현과 수찬이 정원에서 바비큐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그러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소풍 문을 닫고 정원에 숯불을 피웠다. 연기가 닿지 않는 곳에 테이블을 놓고 하얀 테이블보를 깔았다. 약간 쌀쌀했지만, 바비큐 하기 좋은 날이었다. 현이 해종을 부르자고 했다. 전시 준비에서부터 현수막, 작품 철거까지 도와줬으니 한 번은 초대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다. 맞는 말이다. 연재가 해종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해종은 갑작스러운 초대에 놀란 목소리였지만, 빨리 일 끝내고 오겠다고 했다. 수찬이 3실에서 앰프를 가지고 내려와 정원에 음악까지 틀었다. ‘플라이 미 투 더 문’ 외국 여가수의 달콤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재즈가 더 해지니 봄밤의 분위기가 더욱 로맨틱했다.     


연재는 해종에게 받은 작품에 딸기와 청포도를 담았다. 선물로 받은 물건은 당사자 앞에서 잘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작은 예의 아니던가. 수찬이 마블링이 좋은 한우를 참나무 숯에 올렸다. 학원 강사로 일할 때 하도 데어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데 이 순간은 진짜 가족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연재가 테이블에 쌈과 온갖 채소가 든 긴 접시를 양옆에 각각 올리고 정 중앙에 과일을 놓았다. 현이 와인 잔을 세팅하다가 해종이 준 작품을 보며

“어? 그거 형이 만든 건데!”

“망쳐서 버릴 거라길래 가져왔어.”

“망쳐요? 이걸요?” 현이 놀란 눈으로 연재를 봤다. 

“어, 왜?” 현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연재가 손을 멈췄다.

“그거 형이 손도 못 대게 하던 건데. 주인 있는 거라고. 그거 주인이 대표님이셨어요?”

“!!!” 

하긴 연재가 아무리 봐도 망친 곳을 찾을 수 없긴 했다. 이 타이밍에 해종이 왔다. 해종은 불러줘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연재도 현이도 해종을 추궁하진 않았다. 앞의 상황을 모르는 해종은 중앙에 놓인 작품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현과 눈이 마주 치자 티 나게 눈을 깜빡이며 버릴 물건이 잘 써지니 좋다고 했다. 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구워진 고기를 들고 온 수찬은 버릴 물건 있으면 자기한테 버리라고 해서 모두 다른 이유로 웃었다.     

적당히 구워진 고기는 부드러웠다. 고기 한 점을 먹은 연재가 수찬이 올려놓은 고기를 뒤집으러 가자, 해종이 자기가 굽겠다고 따라나섰다. 금세 수찬까지 합세해 오늘은 자기가 굽겠단다. 다들 이런 자리에서 편히 받아먹는 게 부담스러운지 자기가 굽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작은 혼란이 생겼다. 현이 그렇다면 돌림판을 돌리자고 했다. 걸리는 사람이 굽고 나머지는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 결과에 승복하기로. 미안한 마음 없이 먹을 수 있으니 모두 찬성이다. 현이 핸드폰에 있는 돌림판을 눌렀고 이게 뭐라고 모두 긴장된 눈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당첨금 없는 당첨은 연재가 되었다. 로또는 오천 원도 안 되더니 이건 당첨이란 연재의 장난에 해종이 첫판은 무효라며 다시 돌리자고 했지만, 올림픽 정신을 거스르지 말자는 연재의 단호한 결정에 모두 테이블로 돌아갔다.   

  

고기 굽는 숯불 판에서 테이블까지 다섯 걸음도 안 되는데, 한 명이 떨어져 있는 게 걸렸는지, 다들 젓가락만 들었다 놨다 하더니 결국 현이 숯불 판을 들어 테이블 옆으로 옮겼다. 연기를 맡더라도 이게 편하다고 했다. 모두 한시름 놓은 표정이다. 연재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테이블로 다시 왔다. 왔다 갔다 하느라 그나마 구워 놓은 고기도 식어 다시 불판에 살짝 구워 먹었다. 어수선했지만, 서로를 챙기는 마음이 느껴져 연재는 괜히 혼자 뭉클했다.     


연재가 만든 꽃밭을 본 해종은 꽃밭 테두리에 나무로 낮게 경계를 만들면 꽃 보호도 되고 더 아늑하게 보일 것 같다며 싸게 해 줄 테니 생각해 보라고 했다. 연재가 받을 만큼 받고 제대로 만들어 달라고 하자 현이 제대로 만들고 돈은 싸게 받으라고 손 하트를 날렸다. 대신 자기가 인건비 안 받고 조수 하겠다고. 둘은 딜! 을 외치며 남북 정상회담이라도 한 양 악수를 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해종이 들고 온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젠가다. 얘들도 아니고 어른 네 명이 고스톱도 아닌 젠가라니 기가 찼다. 연재의 반응과 달리 두 남자는 곧바로 게임할 자릴 만들었고, 결국 두 팀으로 나눠서 하고 진 팀이 맥주를 사기로 했다. 팀은 손바닥과 손등을 동시에 내밀어 같은 쪽을 낸 사람끼리 짝인데, 연재와 해종이 한 팀이 됐다.   

   

처음엔 이게 무슨 유치한 게임인가 했는데 막상 해보니 장난 없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아슬아슬 곧 쓰러질 무렵이 되자 손에 땀까지 났다. 승부욕이 있는 편은 아닌데, 와르르 무너지는 건 두려웠다. 무너지는 것을 봐야 하는 근본적인 두려움과 나 때문에 우리 팀이 지면 어쩌나 하는 부담까지 생겼다. 제일 만만하게 생각한 연재였는데, 제일 집중하고 있었고, 이 모습에 해종이 웃었다. 첫 게임은 수찬의 차례에 무너졌고 기쁨도 잠시, 두 번째 게임은 연재의 실수로 내주고 말았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게임.  

    

어느 정도 진행되어 구멍이 숭덩숭덩 보이기 시작하자 하나하나 뺄 때마다 심장이 쫄깃했다. 안정을 추구하는 연재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것들 위주로 젠가를 빼는데, 해종은 다음 수를 계산해 가장 위험한 곳만 찾아 뺐다. 그 말은 즉, 연재 팀이 질 수도 있다는 뜻이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다. 해종이 뺄 때마다 연재는 머리털이 삐쭉 서고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설상가상 연재 순서에 수찬과 현이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가뜩이나 휘청거려 조마조마한데, 두 사람의 입바람까지 더해지니 젠가를 빼지 않아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입바람은 반칙 아니냐고 연재가 항변했고, 수찬과 현은 만담 형제처럼 물리적으로 건드리지만 않으면 반칙 아니라고 느물거렸다. 고기 구울 때 보여줬던 훈훈한 풍경은 사라지고 냉혹한 승부의 세계만 남았다.     

 

셋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해종은 매의 눈으로 가장 안전한 곳을 포착해 연재에게 뺄 젠가를 지정해 줬다. 전체적으로 흔들거려 위험한 상황, 지정 젠가를 빼려고 손을 내미는 연재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연재는 뻗었던 손을 다시 철회하고 심호흡을 한 뒤 숨을 멈췄다. 숨도 쉬지 않고 초집중해 젠가를 빼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현이 차례, 현이도 해종의 책략에 도전하듯 같은 곳을 공략했고,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수찬은 안타까워 이를 악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연재와 해종은 활짝 웃으며 하이 파이브를 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연재를 보며 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젠가가 이렇게 재밌는 게임이었다니.


      

수찬과 현이 편의점에 맥주와 간단한 마른안주를 사러 가고 나머지 정리는 연재와 해종이 맡았다. 연재가 빈 그릇을 카페로 옮겨 닦는 동안 해종은 숯불에 나무를 더 얹어 불멍 하기 좋은 화로를 만들고 주변으로 의자를 놓았다. 각자의 미션을 끝내고 모두 자리에 앉아 불을 바라봤다. 밤이 깊어지자 살짝 추웠는데 불이 있어 기온이 딱 좋았다. 수찬이 신곡을 만들었다며 들어보겠냐고 했다. 말이 나왔는데 안 듣겠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수찬이 기타를 가져와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노래했다. 제목도 참신한 ‘자라투스트라의 노래’다. 내용은 역시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즈도 아닌데 당김음이 많아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아방가르드 했다. 서로 눈치 보며 손뼉 칠 타이밍이 아닌가 싶어 움찔했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손뼉을 쳤다가, 박자가 난리다. 이를 본 수찬이 일부러 기타 반주를 빨리했다가 느리게 했다가 박자를 맞추지 못하게 장난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도 나머지는 박자를 맞추겠다는 의지로 수찬과 치열하게 눈치 게임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봄밤이었다.     


                                     *     

3월 한 달 내내 일한 수찬과 현에게 연재는 각각 일주일씩 휴가를 줬고, 수찬이 사월 세 번째 주에, 현이 마지막 주에 휴가를 다녀왔다. 쉬는 날에도 소풍이 걱정돼 맨날 전화하는 현에게 연재는 엘로우 카드를 줬다. 엘로우 카드 두 개면 퇴장이니 현도 더는 전화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먹고 자는 동안 두껍게 덮여있던 가면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현의 휴가 마지막 날, 결연한 표정의 현이 찾아왔다. 현은 연재가 다시 받아줬을 때부터 생각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했다. 프로젝트라니, 연재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거창한가 싶다. 먼저 노트북을 열고 큰 결심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크게 심호흡을 한 현은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선, 시작은 자신처럼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단순히 아픈 사람만 모이는 게 아니라, 이들을 지지해 줄 은퇴한 심리 상담자들과 장차 이들을 고용할 사업주들이 함께하는 커뮤니티. 현이 그랬듯이 정신이 아픈 이들도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받아들여져야 병과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기 위해 심리 상담을 해줄 실력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이들을 고용해 줄 사업주를 모집하는 게 관건인데 일단 하나는 해결했단다.     


현은 일을 기획하면서 제일 먼저 시청 사회복지과에 갔다. 시청 사회복지과를 찾는 것은 현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면 희수 엄마가 사회복지과장으로 있기 때문이다. 현을 처음 본 희수 엄마, 한 과장은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현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히 들었다. 그러더니 돌연 오후 반차를 내고 현과 함께 갈 데가 있다고 했다. 현이 도착한 곳은, 희수의 봉안당이었다. 희수가 그렇게 죽고 한 번도 간 적 없었는데, 한 과장 손에 이끌려 희수를 다시 만난 것이다. 갑자기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제야 이렇게…. 


한 과장은 희수에게 하고 싶은 말 하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아마도 희수가 가장 기다린 사람은 현이었을 거리면서. 그곳에서 희수는 세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라진 희수가 다시 나타난 것 같았다. 현은 눈을 감았다. 희수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긴 장편영화처럼 재생되었다. 눈물이 흘렀다. 희수의 우울을 알아채지 못했던 미안함과 그렇게 가버린 원망과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리움에 몸부림쳤던 시간이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다. 다시 만난 희수는 현에게 이제 그만 슬픔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이제 네 인생을 살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같았다. 현은 지갑에 넣어 둔 인생 네 컷을 꺼내 희수의 사진 옆에 놓았다. 오랜 시간 지갑에 넣어두어 색이 바랬지만, 분명 싱그러운 두 청춘이 거기 있었다. 현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사진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한 과장이 다가왔다. 한 과장은 현의 얼굴을 잡고 뽀뽀하는 딸의 천진한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감춘 한 과장은 ‘그날, 현이 무너졌던 날’에 관해 얘기를 꺼냈다. 현과 마주쳤을 때 한 과장은 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현이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말을 꺼내지 못했고, 현의 어두운 표정이 걱정돼 제하에게 연락했다고 했다. 현은 한 과장이 자기를 원망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괴로웠는데, 그게 아니라니! 외려 나를 걱정했다는 그 말을 들은 현은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꺼이꺼이 우는 현을 한 과장이 토닥여 줬다. 현의 깊은 상처가 이제야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오열하는 현을 달래는 한 과장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한 과장은 사회복지과 국장님과 주무관들을 모아 놓고 이 일에 관해 본격적으로 의논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포용하는 일은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고 춘하시 시범 사업으로 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시 차원에서 현의 프로젝트에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 결과 자원봉사자들에겐 봉사 시간만큼 국가에서 운영하는 1365 자원봉사 포털에 봉사 시간이 인정되어 각종 혜택이 주어지기로 했다. 현직에 있는 심리상담사들은 생업 때문에, 자원봉사 혜택만으로는 봉사를 지원하기 어렵지만, 은퇴한 분들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고, 무엇보다도 삶의 풍부한 경험으로 진정한 상담이 가능하다는 게 현의 논리였다. 이어 어떤 혜택이 있는지 1365 홈페이지를 펴서 보여주는데, 봉사 시간에 따라 표창과 상금을 주고, 공영주차장 무료 이용, 가맹점 할인, 지역 체육센터나 각종 공연, 문화센터 수강 할인 등, 혜택이 적지 않았다.     

이에 더해 동네 공감 능력 높은 할머니들도 자원봉사로 끌어들였다. 

일명 ‘할매 테라피.’ 

공감 능력이 뛰어난 할머니만큼 좋은 상담사는 없다는 게 현의 생각이다. 

과거 현이 정신과 개방 병동에 입원했을 때 하루 한 번 병원 산책로를 걸었는데, 면회 온 할머니들이 벤치에 쉬고 있는 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을 건네고, 위로했던 경험이 있다.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들이었지만, 모두 친손주 대하듯 따뜻한 눈빛으로 현을 바라봤다. 아마도 장소가 정신병동이다 보니 본인 가족 중 현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어 더욱 그러했겠지만, 그때 현에겐 모르는 사람의 따뜻한 눈빛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현이 찾아보니 이런 시스템이 유럽 어느 나라에서 실제로 실행하고 있다고 했다. 한 과장님도 좋은 아이디어라며 일을 추진했다. 다행히도 그런 할머니들은 섭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행정복지센터나 보건소를 통해 추천받았는데, 추천받은 할머니들은 돌아가면서 모임에 참가하고, 그 일은 노인 일자리로 분류되어 일정 금액 돈도 받는다고 했다.      


이들을 고용할 사업주를 연결하는 일은 앞으로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지만, 일단 해종과 제하가 고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해종은 참가자 중 목공을 배워보고 싶은 사람을 채용해 일도 가르치고, 합당한 급여도 지급하겠다고 했고, 제하는 요가에 관심 있는 참가자들을 교육해 요가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한 후, 요가 강사로 채용하겠다고 했다.      


시작은 소박하지만, 언젠가 이것에 관한 필요성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로 예측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린, 가족 구성원 중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집안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렇다면 그런 가족을 가진 사업주는 당연히 이런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업이 알려지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거라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대신 참가자들은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야 하며 꾸준히 모임에 나와 자기 컨디션을 체크해야 한다. 혼자서는 조절하지 못할 순간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데, 함께라면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걸 현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현은 애초에 이 일에 관해 밑그림을 그릴 때 병원에 가면 상담 치료가 있는데, 왜 굳이 이곳에서 해야 할까?라는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감당할 부분과 공동체에서 감당할 부분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몸소 체득했기에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이 일이 복합문화공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거다. 만일 연재가 일주일에 한 번, 공간을 쓸 수 있게 해 준다면 주말 브런치 장사를 접고 그 시간에 이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현의 우려와 달리 연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자고 외쳤다. 연재의 빠른 용단에 어안이 벙벙해진 현이 눈을 껌벅거렸다.     


연재는 그 일에 왜 여기 ‘소풍’에서 이뤄져야 하는지 곧바로 설명했다. 여기에는 글쓰기 수업, 그림 수업, 악기 연주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이 이뤄지는 곳이니 현이 구상한 그 모임에 상담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활동을 접목할 수 있고, 그런 총체적인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연재는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감동했다. 원고를 미리 작성한 것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술술 나오나 싶었다.    

  

현은 난데없는 경례를 붙이더니 국기에 대해 맹세하듯 연재에게 맹세했다. 뭐든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신이 나서 달려 나가는 현을 보며 연재는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라면, 감동을 주는 것이 예술이라면,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이렇게 어울려 사는 게 진정한 예술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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