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배터리에 민감하다. 게이밍 노트북을 산 걸 후회한다. 이는 고사양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 특화되어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유선 충전을 해주지 않으면 금방 배터리가 닳는다. 무겁기까지 하다. 충전하려면 선을 주렁주렁 꺼내야 한다. 그전에 산 맥북에 비하면 뭐가 많다. 지금도 배터리가 몇퍼 남았는지, 언제 충전기 선을 꺼내야 하는지 눈알을 굴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게이밍 노트북을 괜히 샀다. 이것은 날 불안하게 만든다.
정작 배터리가 방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렇게 불안에 떨면서도. 60%, 50%, 20%. 19%의 장벽에 들어섰을 때 엉덩이를 일으킨다. 상대편은 전혀 협상할 맘이 없다. 난 옷장에서 충전기 선을 꺼낸다. 오늘도 내가 졌다. 돌이켜보면, 난 한 번도 배터리가 다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인생을 끝까지 망쳐본 적도 없다. 맘 속에선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어진 적은 없다.
하루에 한 끼라도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나다. 저녁 6시다. 오늘은 한 끼쯤 건너뛰어보리라 맘먹는다. 그러나 6시 58분이 되는 순간 프라이팬을 꺼낸다. 돌이켜보면 난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다.
엄마 아빠 말이라곤 무시해본 적 없는 나다. 나 하는 것 막은 적 한 번도 없는 그들이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다. 온전히 결재 칸에 내 이름 석 자만 찍혀있는 프로젝트 한 장을 원한다. 하지만 집안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난 다시 그 계획을 뒤로 미룬다. 돌이켜보면 난 한 번도 스스로 끝까지 밀고 나간 적이 없다.
퇴사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나다. 이력서를 쓰다 알았다. 인생에 공백이 없다. 경력이 한 장, 두 장, 세 장 반을 넘어간다. 물론 사이사이에 느낀 점을 쓰기도 했지만. 어디 훌쩍 떠나가 볼까도 생각한다. 하지만 일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난 통장잔고가 0원이었던 적이 없다.
내 몸은 배터리가 표시되지 않는다. 대충 오늘은 몇 퍼 정도. 선장이 항해 전 물길을 가늠하듯 어림 잡을 뿐이다. 몇십 년 간 입은 몸이라 센서는 제법 정확하다. 근데 그게 좋은 걸까? 정말 한 번도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되는 걸까? 매일 불안하더라도 몸이 안전한 게 좋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