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는 건 멈춰있는 것이다
난 욕 먹는 게 싫다. 그래서 살면서 욕 먹을 만한 일은 다 피해다녔다. 2살짜리 애가 울지도 않고 얌전히 있으니 할머니는 "야. 이런 애만 있으면 열 명도 더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사춘기 때도 부모님은 "사춘기는 원래 없는 거다."라 해서 '사춘기는 이 세상에 없는 거구나!'며 그냥 착하게 지나갔다. 선생님께 꿀밤 한 번 맞은 적도 없다. 이런 쪽으로는 동물적 감각이 상당한가보다. '이거 분명 욕 먹는다'란 생각이 들면 그 행위를 바로 그만 둔다. 그래서 난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주구장창 욕을 먹었다. 정치인이 욕먹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을 이리저리 바꿔 욕을 먹기도 하지만, 추구하는 신념이 달라 욕을 먹기도 한다.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는 대부분 후자였다. 남들이 쉬쉬하는 주제만 골라서 터트렸다. 난민, 다문화, 고려인, 교통난, 부동산…. 친구가 "난민 수용 찬성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냐?"라고 할 땐 땀이 삐질 났다. 아빠 지금 시청에서 난민지원조례 발의하고 있는데.
한날은 얘기했다. "아빠. 이상한 조례 좀 그만 발의하면 안돼?" 그는 이미 묻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곤 얘기했다. 자긴 욕 먹는 것보다 일관성을 잃는 게 더 두렵다고. 살아가는 대로 정하는 게 아니라, 정한 대로 살아가는 것. 그러고보니 그에겐 나름의 일관된 논리가 있었다. 기계적 평등이 아닌, 자유경쟁 속에서 패자 부활전이 존재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자. 반대로 그와 논쟁을 벌이는 반대파 의원들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우리 편은 좋은 편, 남의 편은 나쁜 편'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차원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싸움도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싸우려고 싸우는 것, 둘은 신념과 신념이 부딪치는 것. 모든 싸움이 전자는 아니다. 마냥 욕 안 먹는 게 좋은 것도 아니다.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아무것도 안 하니 욕 먹을 일도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올바른 일꾼일까?
나의 타고난 동물적 감각!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 학교에서까진 잘 써먹었다. 그러나 사회에선 안 통한다. 약발 다 떨어졌다. 위험 신호가 울려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태반이다. 사장님이랑도 싸워야하고, 사규와 매뉴얼과도 싸워야하고, 손님이랑도 싸워야한다. 그렇다고 내 잘못은 아니다. 상대방 잘못도 아니다. 신념과 신념이 부딪힐 뿐이다. 살아 움직인다는 증거다.
우리 삶은 진주목걸이다. 다르게 생긴 알갱이들을 주워 하나의 실에 엮는다. 관계 없어보이던 것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남는다. 조용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엮기 위해 내 몸 한 가운데 구멍을 뚫어야하니까. 그러나 그 순간 알갱이는 파편을 넘어 새로운 형태가 된다. 하나밖에 없는 개성이 된다. 곧 삶이 된다.
생각에 잠긴다. 난 지금 파편 조각일까. 아니면 하나의 목걸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