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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Mar 04. 2024

작고 어린, 곤졸

제5회 적도문학상 수상 (2)

  당숙네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전화기가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는 사람이 있건 없건 전화할 일이 있으면 당숙네 들러 마루 끝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곤 했다. 이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요할 때 와서 쓸 수 있는 그런 전화기였다. 유나가 저수지까지 걸어 나갔던 그 날 할머니는 당숙네 들러 큰아들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걱정 말어. 첨엔 만날 밖으로 뛰나가서 질질 울더니 이자 좀 괜찮여……. 장난감이 뭐 필요햐. 지천이 다 놀이턴디…….” 

  “지들 때랑은 달라여. 우리 때나 들로 산으로 나가 놀았지.” 


  생각해보면 육남매를 키웠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장난감을 사주거나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같이 놀아줬던 기억은 더더욱 전무했다. 애를 낳고도 며칠 지나지 않아 툭툭 털고 일어나 밭일을 나갔던 시절이었다. 채 스물도 되지 않아 큰 애를 낳았으니 어리고 젊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할머니는 생각했다. 아이들을 낳긴 했지만, 그 애들이 자라는 동안 한 일이라고는 밭에 나가 땅을 메고, 때마다 명절을 치르고, 여덟 식구 뒤치다꺼리와 끝도 없는 집안일들이었다. 봄이다 싶으면 금방 여름이 왔고 가으내 정신없이 일을 끝내면 성큼 겨울이 와 있었다. 달력에 표시해 놓은 온갖 대소사를 하나씩 치르는 사이 날짜는 세지 않아도 그렇게 일 년씩 훌쩍훌쩍 지나갔었다. 육남매는 고맙게도 밥만 차려놓고 나가면 지들끼리 먹고, 놀고, 싸우고, 자며 나름의 하루를 보냈다. 집밖이 다 놀이터였고 돌멩이가 장난감이던 때였으니까. 문득 할머니는 육남매에게 해준 거라곤 삼시 세끼 밥상이 전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정말 지들끼리 자라 어느새 어른이 되어 하나둘 도시로 떠난 거였구나. 싶었다.


  당숙네 막내 용이 아재는 자식 대부분이 다 도시로 떠난 이 마을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젊은이 중 하나였다. 큰애네가 왜 막둥이를 놓고 갔는지, 지만 떨어뜨려 놓고 간 걸 알고 유나가 며칠째 어쩌고 있는지, 할머니는 고해성사하듯 줄줄 그간의 일들을 풀어놓았고, 용이 아재로부터 한 번씩 꼬맹이와 놀아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녀였지만 요즘 애들은 다르다는데, 육남매 때처럼 그냥 둔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한 살이라도 젊은 용이 아재가 한 번씩 놀아준다니 지고 있던 어깨의 짐이 반쯤 덜어진 것 같았다.      


  곤졸에는 유적지처럼 취급되는 곳이 있었다. 할머니 집 앞길에서 당숙네로 이어지는 냇가 다리 반대편에, 논과 밭이 모여 있는 땅으로 찔러 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었다. 원래 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자주 다니면서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풀이 자라지 않고 흙이 드러나 길처럼 되어버린 곳이었다. 양옆으로 온갖 잡초와 돌보지 않은 풀들로 무성한 그 길 한편에 생뚱맞게도 정자 같기도 하고 사당 같기도 한 옛 건물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주변은 어른 키 정도 되는 높이의 돌담으로 네모나게 둘러싸여 있었고 빛바랜 붉은빛의 작은 대문도 있었지만 잠겨있는 건지, 잠겼다고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은 건지, 누구 하나 그곳을 들어가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귀신이 사는 집이라고도 하고, 예전에 유배당한 정승이 내려와 지냈던 곳이라는 소문도 있다는데 정확하게 누가 살았는지, 왜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옛 건물에 대한 용이 아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유나와 아재는 정자가 보이는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아재는 길게 자란 잡초로 둘러싸인 그곳이 잘 보이도록 유나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워주었다. 어린 유나의 눈에도 그곳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곳 같아 보였다. 아무렇게나 막 자라 있는 풀들은 마치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경계의 손사래를 치는 듯했다. 


  “어 뱀이다!” 


  살아있는 건 벌레조차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걸 발견 한 건 유나였다. 알록달록한 돌담 사이에서 발견한 뱀은 티브이에서 봤던 것들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아주 어린 새끼이거나 원래 크기가 작은 종류 같았다. 전반적으로 붉은빛이었고 뱀 특유의 거뭇거뭇한 무늬들도 있었다. 유나는 꽤 가까이에서 뱀과 마주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른인 용이 아재만 잔뜩 긴장한 채였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생명체가 신기한지 뱀도 빤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유나는 문득 뱀이 참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똑똑해 보이기까지 했다. 잠시 그렇게 두 인간을 주시하던 뱀은 작은 혀를 날름거리더니 스르르 돌과 돌 사이 작은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운 유나는 노트를 펴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알록달록 칠한 뱀의 눈엔 공주의 눈에 붙여주었던 휘어지는 눈썹도 그려주었고 동글동글한 담장도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린 유나는 입으로 말하며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옆에서 바느질하던 할머니는 작은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내려가는 유나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아이고, 우리 유나가 엄청 똑똑허네에- 글씨도 잘 쓰고. 이게 뭐여…….?” 


  유나의 노트를 들여다보며 쓱 다가온 할머니는 주름진 손가락으로 맨 앞 글자를 가리켰다. 


  “이거?” 

  “나는” 

  “이.. 그럼 이건?” 

  “오늘. 할머니 글씨 몰라요?” 

  “이. 할미는 글씨 몰러. 유나가 좀 갈켜줄려?” 

  “나도 혼자 깨쳤는데 할머니는 왜 공부를 안 했어요?” 


  유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르게 말여. 할미는 게을러서 글씨를 한 개도 못 깨쳤으. 할미 좀 갈켜 줄텨?” 

  “에효, 잠깐만요. 이거부터 다 쓰고요” 


  유나는 턱을 쭉 빼고 눈을 내리깐 채 대단한 일이라도 하듯 마저 글씨를 써나갔다. 어린 스승을 내려다보는 제자가 된 할머니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기대에 차서이기도 했고 대견해 보여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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