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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Nov 17. 2024

현상해 드립니다

(7)

모이기로 한 날을 세고 있으면서도 나가야 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편의점 알바 시간을 다른 알바생과 바꿔야 했는데 계속 고민만 했어요. 모임을 이틀 앞두고 사장님한테 얘기했는데 이제 얘기하면 어떡하냐고 화를 냈어요. 대타가 널 위해 대기 중이겠냐며 짜증을 부리셨죠.


하루 전날, 결국 대타를 구하지 못했어요. 난 선약 때문에 나가지 못한다고 글을 남겼어요. 사실이었는데도 왠지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친구들은 아쉽다는 댓글을 남겼고 그 애도 아쉬움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남겼어요. 나는 답글 대신 엄지 척 손모양을 남기고 조용히 방에서 퇴장했어요. 그리고 그 애의 흔적을 다시 보이지 않게 숨겨뒀어요.


일 학년 초에 우연히 만난 동기를 통해 그 애와 선배가 여전히 잘 지낸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어요. 각자 다른 대학에 갔지만 여전히 사귀고 있다고. 선배가 곧 군에 갈 예정이지만 설마 깨지겠냐며 친구는 묻지도 않은 예언까지 친절하게 덧붙였어요.


그 애를 못 본 지 일 년 가까이 됐고 일 년을 한 달처럼 느끼게 한 무수한 일들이 그 시간을 채웠으니, 빽빽한 그것들 덕분에 내 마음은 밀리고 밀려 멀어지지 않았을까, 희미해지지 않았을까, 기대했어요.

삼 년 내내 혼자만 공유하느라 사실 힘들었어요. 그래서 졸업하던 지점에 그 마음도 함께 내려놓고 제법 멀리 왔다고 생각했어요. 내 맘대로 마음을 키웠고 혼자 애달팠고 혼자 외로워하다 혼자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어요.  

대타를 구하지 못한 게, 아니 구하지 않은 게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기껏 이렇게 떨어뜨려놨는데 보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입대를 일주일 앞둔 동기 놈은 며칠 후 따로 만났어요. 끌려가기 싫다고 징징대던 녀석은 기껏 위로주를 얻어먹으며 안 해도 될 말을 또 떠들었어요.

군대가 진짜 무서운 덴지, 흐르는 시간이 무서운 건지. 신화 같던 커플의 신념 같던 믿음이 결국 깨졌더라고. 군대 탓인지, 길었던 동행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를 아는 애들은 없더라고. 덕분에 함께 한 시간과 애정의 크기는 정비례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학습했다고.


그날 그 애는 술을 많이 마셨대요. 조그만 애가 그렇게 술을 잘 먹는지 몰라 다들 놀랐대요. 그 애는 꽤 염세적으로 보였고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넋두리를 늘어놨고 사는 게 참 웃기다며 계속 술잔을 비웠대요. 선배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은 이별의 상처가 커 보이는 그 애를 위로했는데, 그 애는 전혀 괜찮다며 큰 동작으로 부정하다가 갑자기 욕을 하다 이젠 미련도 없다고 웃기도 했대요.

그렇게 떠들던 그 애 입에서 느닷없이 내 이름이 나왔을 땐 다들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대요. 그 애는 왜 내가 안 왔냐고, 보고 싶었는데, 내가 없어 말할 사람도 없다며 취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대요. 동기 놈이 걱정스러워 데려다주겠다니까 배웅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만 허락되는 일이라며 혼자 가버렸대요.

다음날 톡방에 생존 신고를 한 그 애는 다 기억나진 않지만 쪽팔린 짓을 한 것 같다며 잘들 살라는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대요.       


술집에서 나올 때 친구 놈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중얼거렸어요. 너랑 걔랑 그런 사이였는지 몰랐다고.

그게 무슨 사이였냐.. 내가 물었지만 취한 그놈은 내 말을 듣지 못한 채 가버렸어요.      



그놈을 보내고 나도 뒤따라 군에 갔어요.

제대할 때가 되니 학년이 엇갈리고 계절이 엇갈리며 동기들 대부분과 연락이 끊어져 있었어요. 비슷하게 다녀와 비슷하게 복학한 친구 몇만 남아있었죠.      


별 거 한 것도 없이 어느새 4학년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복학할 때부터 머릿속에는 졸업과 취업이라는 글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은근하고 꾸준히 전신을 압박하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봄은 또 돌아왔고 벚꽃은 피었고 도서관을 나서던 내 어깨에도 뽀얀 꽃잎이 내려앉았어요. 무척 평범했던 그즈음의 어느 날 느닷없이 그 애한테 연락이 왔어요.          



야 잘 지내냐?

오랜만에 좀, 걸을래?          



발이 움직이지 않아 멈춰있는 동안 머리와 어깨에 꽃잎이 더 내려앉았어요. 작고 가볍고 화사한 그 꽃잎이 몸에 닿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내게 일어난 것 같았어요.          



사회인이 된 그 애와 마지막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오 년 만에 다시 만났어요. 그 애는 버스에 오르던 모습 그대로 꽃비를 맞으며 나타났어요. 물리적으로 계산되는 시간이 오 년 넘게, 육십 개월 이상, 천팔백일이 넘는 하루하루가 지났는데. 그 애를 대하는 내 마음은 오 년만큼도, 육십 개월만큼도, 천팔백일 만큼도 멀어지거나 흐려져있지 않았어요. 미친놈의 마음이 그대로 내 안에 있었더라구요. 분명히 멀리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절망스러웠어요.

그러면서 또 떨렸어요..      


그 애와 나는 나란히 한강변을 걸었어요. 걷는 내내 그 애는 학원이 끝나고 함께했을 때처럼 내내 조잘거렸어요. 그 사이 화장이 자연스러워졌고 옷과 머리 스타일이 어른스러워졌지만 말투와 목소리는 그때와 똑같았어요. 차라리 속물 같고 건방지고 영악해졌더라면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을 텐데. 하필,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그냥 그때의 그 애라서, 나도 그때처럼 또. 그 애를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그 애는 기자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작은 출판사의 평범한 직원이 됐다고 했어요. 어릴 때는 성인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슨 일이라도 하는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더라고 했어요. 그저 그런 사회의 일원이 된 것만도 지금은 만족한다는 말을 할 때는 약간 허탈한 표정을 짓기도 했어요.


우리는 한참을 걷다 적당한 곳에 앉았어요. 혼자 떠드느라 치쳤는지 그 애도 잠시 말을 멈췄어요.

그 애의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진다고 깨달을 즈음 고개를 돌리다 그 애와 눈이 마주쳤어요. 그 애는 아까부터 날 보고 있던 것 같았어요.

여전히 말이 없는 내가 신기하다고 그 애는 말했어요. 변하지 않은 모습 때문에 여전히 믿음이 간다고. 그래서 마음속 얘기를 계속 꺼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애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내가 어색하게 웃었을 때 그 애는 물었어요.

너는 왜 한 번도 다가오지 않았니.

왜 한 번도 니 마음을 말하지 않았니.

왜 내게 한 번도 너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지 않았니..     


늦은 시간에 만나지 않은 걸 후회했어요. 빛이 덜해 내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이 아니어서, 너무 넓고 환한 곳이어서 후회했어요.

후회되는 수백 가지의 것들이 머리를 때리며 지나갔어요.

변하지 않은 내가 여전히 바보 같은 것이.

여전히 그 애에 비해 보잘것없는 것이.

이 아름답고 환한 날에 만난 것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그 애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 또 이렇게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것이.

그래서 내 마음을 알게 하지 못하는 것이.

끝내 어떤 것도 그 애와 공유하지 못할, 내가..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그 애는 천천히 일어나 내게 악수를 청했어요.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작은 손을 잡았어요. 그 애는 잘 지내라는 인사를 건넸어요. 꽤 슬픈 날로 오늘을 기억할 것 같다고 말할 때는 입술이 조금 떨렸고 애써 미소를 만들어 보였어요.      


정전 후 다시 전류가 흐른 것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애는 멀어지고 있었어요.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작고 가볍고 화사하게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어요. 정으로 머리를 맞아 땅에 박힌 바위처럼 나는 굳게 자리에 서 있었어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내내.

지금까지..          



당신을 찾아온 그녀를 잡지 못한 이유가 궁금해요.

왜 그때라도 고백하지 못했나요?



모르겠어요.. 지난 시절의 내가 후회스러워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버려뒀으면서.

왜 또 여전히 용기 내지 못했는지..

난 왜 이렇게 항상 바보 같기만 한 건지..


그날의 나에게 화풀이하고 싶어요.

그날의 나를 찢고 싶어요. 찢어지고 태워지는 벌이라도 주고 싶어요.



고객님.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그날의 기억을 구현해 봤어요.

당신이 맞나요?



네. 맞아요.. 하찮고 또 하찮았던 그날의 나네요.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까먹고 무생물처럼 서 있던.

바위 같은 나네요.     



당신의 표정과 미동 없는 몸짓에서 슬픔이 느껴져요.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그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껏 사진을 찢고 불태워 보세요. 먼지처럼 작아지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사진을 보면 힘들었던 기억도 사라질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갇혀있던 기억이 먼지가 되고 연기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사진은 얼마든지 현상해 드릴게요. 원하시는 수량을 눌러주세요.

     


안쓰러워요..



고객님.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근데 이 남자.

너무 안쓰러워요..


위로해주고 싶을만큼…



고객님의 의도를 다시 파악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당신의 새로운 감정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후회로 가득 찬 저 미련한 표정. 어떤 마음인지 내가 잘 알아요..

혼자 설레었고 혼자 가슴 앓았고 혼자 외로웠던 게 뭔지

내가 너무 잘 알거든요.


안쓰러워요..

그 애만 바라보느라 하루하루 더 작아지고 더 용기 없어지던 자신은 바라보지 못했던.

미련하고 바보 같은

나인, 이 남자가요.


이렇게 나를 바라보니, 위로해 주고 싶어져요..

지금이라도..


이제라도요..



고객님.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인간이 가장 외롭고 힘든 때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못할 때라고 해요. 당신을 더 외롭고 힘들게 만들었던 건 다른 곳을 향했던 그녀의 마음뿐 아니라 연약했던 자신을 돌보지 않은 당신 자신 때문이었을지도 몰라요.


지금이라도 당신인 그 남자를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기억 속에 갇혀 힘겨워하는 그는 아마 그 안에서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힘겨운 기억 속의 당신을 놓으려 하지 마세요. 깊이 안아주세요.

외롭게 그녀를 사랑했던 당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무능해 보였던 당신도, 사랑해 주세요.

그 모든 모습이 당신인 게 맞으니까요.

이제라도 그렇게 해주세요.

세상에 자신만큼 소중한 건 없다고 하잖아요.


현상을 원하시면 버튼을 눌러주세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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