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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훈 May 25. 2019

여행에 미친 여자와 결혼했다

13) 그녀의 매력


 그녀와 나는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1년 일찍 입사한 선배였고, 심지어 보조 면접관 자격으로 나를 면접했다. 면접이라는 이름이 주는 부담감과 함께 나는 꽤나 긴장을 한 상태였고 그녀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저 기억나는 거라곤 작은 체구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와서 닥터슬럼프의 아리 같았다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면접을 통과해 입사하게 되었고, 면접의 인연으로 그나마 친숙한 그녀를 의지하며 회사를 적응해갔다. 업무 숙지 및 처리 등을 이유로 혹은 핑계로 그녀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며 친해졌고 함께 커피를 마시고 치킨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나보다 어리다곤 해도 선배였기에, 심지어 면접관이었기에 뭔가 어려운 느낌이 있었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메시지 하나를 받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자꾸 연락하는 이유가 뭔지 입장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어요. 관심 있는 게 아니라면 연락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태어나서 받아 본 메시지 중에 가장 당돌한 메시지였다. 물론 호감이 있으니 연락도 하고 친해지려 한건 맞지만, 당장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하니 적잖게 당황했다.


 몇 번 연애를 한 적은 있지만, 용기를 내어 고백해 본 기억은 없었다. 어울려 지내다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게 되어 자연스레 그렇게 됐을 뿐, 나에게 고백이란 단어는 이미 확신이 생긴 상태에서 공식적으로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 같은 것일 뿐이었다. 우유부단한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런 나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라니!


 돌이켜보니 내가 당한 건 세계여행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당했고, 그렇게 우리는 시작했다.






 나는 여자의 외모를 본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성격과 코드가 잘 맞아야 한다는 것이지만, 일단 예선은 통과해야 성격과 코드를 맞춰 볼 여지가 생긴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말인데, 나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녀의 입장이 이상해 질 테니 나는 분명히 여자의 외모를 본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빌려 쓰자면 내 이상형은 슬렌더(날씬한)라고 볼 수 있는데, 그녀를 보면 내가 평소에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하늘이 나를 예뻐하시어, 슬렌더도 모자라 극세사인 그녀를 내려주셨다. 조금 덜 착하게 살았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도 좋지만... 그녀가 조금은 더 잘 먹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겠다.
 
 오로지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녀는 어릴 때 현대무용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춤을 잘 춘다. 나도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해서 집에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사놓고 자주 음악 감상을 한다. 특히 아침에 음악과 함께 하면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는 느낌이라 좋다.


 그 성향은 여행 중인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숙소에서 여유를 가질 때면 노래를 틀어놓곤 하는데, 요즘에 점점 노래를 틀기가 무섭다. 노랫소리만 들리면 그녀가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루브만 타던 그녀가 슬슬 노래를 익히더니, 이제는 따라 부르기까지 하며 비트를 쪼갠다. 옛 가요부터 최신 팝송까지, 발라드부터 힙합까지 가리지 않는다. 댄싱 9 애청자답게 아이돌 댄스부터 왁킹, 락킹, 크럼프까지 접목시킨다. 헬멧을 주면 헤드스핀도 할 기세다.


 가끔 보면 이 세상 흥이 아닐 만큼 압도적인데, 정작 그중에 현대 무용은 없다. 도대체 현대 무용은 왜 배운 걸까 싶었지만,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모님의 의중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저 흥을 억누르기 위해서 배우게 한 건 아닐까.


 한국 가면 다시 배우게 해야겠다!





 
 그녀는 나와 다르게 술을 즐기지 않는다. 나도 술을 즐긴다기보다는 술자리를 즐기는 거라고 십여 년째 말해오고 있다.
 하지만 30대가 되면서 퇴근 후엔 맥주, 밥 먹을 땐 반주가 자꾸 생각나는 걸 보면 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녀와 데이트할 때도 자연스레 종종 술을 마셨다. 그녀는 보통은 과일향이 나는 톡톡 쏘는 소주나 맥주를 마셨는데, 그마저도 과음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녀가 함께 소주잔을 기울여주는 술친구가 되었으면, 내가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함께 가서 어울려 놀았으면, 분위기나 경치가 좋은 곳에서 맥주 한잔 하며 기분을 내는 데에 낭만을 가졌으면 할 때가 있어 아쉽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술을 즐기지 않아 참 다행이다.

 연락두절부터 인사불성, 심지어 범죄까지 이어질 수 있는 술이 만들어내는 각종 사건들과 그로 인해 주변에서 겪는 걱정, 스트레스 등을 어쩌면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리고 그동안 술로 인해 속 썩였던걸 인내하고 용서해준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고 싶다.

 앞으로는 술을 줄인다는 다짐과 함께!






 이외에도 그녀의 매력은 무궁무진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면 지루해질 우려가 있어 여기까지만 쓰려고 한다. 진짜다.


 마지막으로, 요즘 그녀의 매력요소 제1순위는 (권상우 님께는 죄송하지만) 바로 ‘소라게’다. 뜨거운 해를 가리기 위해 사진과 같이 챙이 넓은 모자를 항상 쓰고 다니는 그녀는 컨디션이 좋을 때면 소라게 개인기를 보여준다.


 ‘마음은 아프지만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보내줄게...’를 얼굴로 말하며 모자를 눌러쓰는 그 메서드 연기를 나 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p.s - 이 글은 결코 그녀의 강요에 의해 쓴 글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 여행지_꼬깔리토스







*세계여행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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