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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훈 Apr 10. 2019

여행에 미친 여자와 결혼했다

1) 여행하려고 결혼하다


 나는 30대 중반의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이다. 성격은 다소 소심하고 우유부단하여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축구와 게임을 즐기며 그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내다 그저 그런 대학에 입학하여 여기저기서 부르는 대로 술 마시고 놀다 보니 때가 되어 군대를 갔다.


 전역 후 한 학기 정도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산 기억이 있으나 신입생 때 내가 술 마시고 노는 걸 눈여겨본 한 선배의 추천으로 전공 학과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신입생들, 예비역들과 어울려 열심히 술 마시고 놀았다.


 이래저래 졸업과 취업할 나이가 되어 은행원이 되겠다며 남 모르게 준비하고 있었으나(남을 많이 의식하고 우유부단한 나는 뭐든 몰래 한다. 안 되면 창피하니까.) 내 인생에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답게 아버지의 권유대로 경찰 공무원 공부를 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했으나 절실함도 사명감도 없었던 내가 합격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 아니었고 몇 년을 허비하다가 결국 방향을 틀었다. 영문과를 졸업한 나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인생 2막이 열리기 위한 전조였을까.


 딱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서른 살의 나는 결핍의 아이콘이었다. 이십 대 때 겪은 몇 번의 낙방과 늦은 취업은 나의 자존감을 짓뭉갰고, 사람들과 부단히도 어울리며 쌓였을 법한 인맥도 상당수 잃었기 때문에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꼴에 고시 공부한다며 메신저도 삭제하고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려 노력했고 그러면서 매일매일을 외로워했다.)


 서른이나 되어 결국 경찰공무원 준비를 포기하기로 한 후,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으나 나이와 눈만 높아진 채 마땅한 스펙도 없는 나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낙담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렇게 얻은 일자리를 구원이라고 여기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무조건 친구들보다 많이 벌고 싶었고 부모님께도 떳떳하고 싶었다. 취업 실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내가 잘하는 일로 만들어야 했다. 내 시간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었다. 일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주말도 없이 약 4년을 앞만 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회사 내외로 꽤나 인정받고 있었고 조기 승진을 앞두게 되었다.


 물론 삶의 낙과 보상은 필요했는데 사치와 여행이 그것이었다. 독립과 함께 부모님의 도움이 조금 있었지만 작은 신축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고 가전을 채워 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수입 세단을 몰고 프라다를 신었으며 꼼 데 가르송을 입고 린드버그 안경을 썼다.

 그리고 휴가를 모아 여행을 다녔는데,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 덕에 일 년에 두세 번은 짧게라도 해외를 다녀왔다. 동남아, 일본, 미국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일상이 힘들고 지칠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러한 보상은 나에게 좋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다들 일에 치여 나를 잃어간다고 말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제야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우월감에 취하여 창창할 것만 같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을 즈음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내게 전해왔다.


 “나 6개월 동안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

 “... 그럼 나는?”


 그녀를 만난 지 약 4년이 지났을 무렵이었고 내 나이는 서른다섯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나이도 그렇고 시기도 그렇고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에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결혼 자금에 보태야 할 마당에 모아둔 돈마저 여행하며 다 쓰겠다니 이건 우회적인 이별통보나 다름없었다.


 한 달도 긴 것 같은데 무슨 6개월이냐고 했더니 어릴 때부터 세계여행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럼 진작 좀 다녀올 것이지 왜 지금이냐고, 왜 하필 나 만날 때 이러냐고 했더니 오히려 결혼을 생각할 만큼 진지하게 만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혼하면 진짜 못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지금 아니면 평생 못 갈 것 같다고.

 내 입장은 생각 안 하냐고 했더니 당연히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해서 지금까지 말 못 하고 미룬 거라고 한다.

 그럼 헤어지자는 거냐고 했더니 그건 아니란다.

 그럼 여행을 포기하는 거냐고 했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그렇게 잠시나마 주도적으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았던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회사도 돈도 인적, 사회적 커넥션들도 모두 놓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1개월 반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 여기 남아메리카에 와 있다.

 다들 거창하게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모든 걸 놓고 세계여행을 떠나던데, 나는 애써 찾아놓은 나를 버리고 여행을 당했다. 결혼도 안 한 남녀가 6개월씩이나 함께 여행을 떠나기엔 부담스러운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나는 여행하려고 결혼했다.






*세계여행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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