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만한 세상

스리랑카에서 매일 기부 중

by 안녕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책 [과잉 근심] 중에서









모기에게 기부하고 있는 중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근데 룸메이트 애들린이 카레 Curry를 함께 먹자고 했다. 야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이닝룸으로 이동했다. 용무가 있어서 외출했던 사장님이 사 온 카레와 난이 테이블에 있었다. 카레와 난이 너무나 익숙한 스리랑카 사장님과 처음 보는 낯선 음식을 앞둔 필리피노, 그리고 스리랑카 테이크아웃 버전이 처음인 나는 테이블 위의 카레를 놓고 그렇게 한 마디씩 했다. 한국에서 맛본 것보다 더 진하고 강렬했던 그 카레는 참 맛있었고, 카레와 함께 한 대화도 참 유쾌했다고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모기의 무자비한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 카레를 즐기지 못하고 모기에 더 정신을 쏟고 있는 나였다. 모기를 사망에 이르게 하려다, 물린 부분을 긁적긁적하다가 내가 하도 부산하게 구니까 모기약 분사라는 조치를 취한, 사장님은 한 마디를 건넸다.


"기부했다고 생각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다음 생에"




다음 생이라는 게 걸리지만 모기에게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니까 이 상황이 조금 견딜 만 해졌다. 우리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고, 카레와 난을 먹었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음식, 나는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설거지할 사람을 정하자고 제안했는데, 스리랑카 사장님이 가위바위보를 처음 듣는다고 하여 변수가 생겼다. 근데 착한 애들린이 작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사장님께 가위바위보 게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애들린은 돌아왔고, 우리는 꽤 오래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했다.








스리랑카에서 매일 기부하는

다음 날, 딱 500루피만 들고 숙소를 나섰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여행의 방침이랄까. 딱 필요한 경비만 가지고 외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일 먼저, 늘 가던 레스토랑에서 400루피짜리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걸어서 3분 거리의 네곰보 바다로 향했다. 거스름돈 100루피를 소중히 바지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화창한 날이었다. 성수기가 아닌 탓에 바다에 사람도 많지 않았다. 평일이어설까. 암튼, 파도타기에 제격인 날이었다. 그렇게 폴짝폴짝 파도를 타고, 방전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돗자리, 수영복, 기념품, 팔찌... 다채로운 품목의 장사꾼들이 몰려왔다. 단호한 거절과 적절한 무관심으로 대부분의 장사꾼들을 떠나게 만들었는데, 유독 팔찌 장수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는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뭐랄까. 물건을 팔기 위해 듣기 싫은 얘기를 일방적으로 하지 않았고, 그냥 융화하는 느낌으로 수줍은 듯, 선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자리에 머무는데 100루피를 그에게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앞서 애들린이 2개 500루피에 샀다는 그 팔찌를 100루피에 살 수 있다면 애들린이랑 하나씩 추억으로 간직해도 좋겠다고. 근데 거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그에게 내 제안을 말했고 그는 별 주저함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거래가 막 성사되려고 하는데, 호주머니에 있어야 할 100루피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어제는 내 피를 모기에게 기부하더니, 오늘은 바다에 내 100루피를 기부했나 봐. 나는 매일 스리랑카에 기부하고 있는 중이야.



산다고 했다가 번복한 나에게 화를 낼 것 같았던 팔찌 장수는 나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돈을 찾아보라고 했다. ‘돈을 찾아보라고?’라고 정색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에 순응하며 돈을 찾아 나섰다. 미안함을 상쇄하려고 돈 찾는 시늉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2-3분을 누비고 다니다 100루피는 아니었지만 6루피를 주웠다. 6루피로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돈을 찾으러 갔다가 진짜 돈을 찾아설까. 아니면 오랜만에 줍는 동전이라 그랬을까. 기분이가 좋았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팔찌 장수에게 “돈을 찾게 된다면 꼭 너에게 팔찌를 살게”라고 말하며 대화의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데,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손익분기점을 설명해줄래?




그는 근육질의 건장한, 나이는 이십대로 추정되는 스리랑카 사람이었다. 그는 팔찌를 무려 5달러에 샀다며 절대로 그 장사꾼한테 팔찌를 사지 말라고 우리한테 조언을 했다. 장사꾼에겐 삿대질을 하며 화를 냈다. 이 넘나드는 팔찌 가격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되긴 했지만 딱 보기에도 조잡한 그 팔찌를 5달러에 산 것도 참 이해불가, 이 한국적인 사고로 납득하기 어려운 동남아의 하루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는 그렇게 팔찌 장수꾼을 떠나게 했고, 이어 우리와 대화의 물꼬를 틀려고 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첫 질문은 국적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근데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자랑을 풀기 시작했다. 미국 UCLA에서 경영을 전공 중인 대학생이라고 했다. 동남아에서 나는 의심만 늘어가고 있는 걸까. 나는 그에게 “순익분기점 Break-even point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니?”라고 물었다. 그는 손사래와 함께 "커몬 COME ON"을 외치더니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바다에 얼마를 투자했지만, 너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면 손익분기점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라고. 나는 다소 아리송한 그의 대답을 듣고 경영을 공부하는 게 진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 후 두바이에 이어 한국으로 여행을 갈 것이라는 그의 계획까지 듣게 됐다. 전혀 예상치 못한 한국이라는 어휘에 애들린은 나에게 눈빛을 보내왔고, 나도 호기심이 동해 한국엔 무슨 일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에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애들린은 나에게 또다시 눈빛과 미소를 보내왔다. 나는 거기까지만 듣고, 돈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가야겠다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파라솔로 돌아온 나는 애들린에게 뒷이야기를 접했다. 그는 저녁에 데이트를 하자고 계속 수작을 걸었고, 애들린은 호응 없이 여동생이랑 메신저를 지속했고, 뜻대로 안 풀려가는 상황에 불쾌해진 그는 지푸라기 같은 것을 던지고 퇴장했다고 했다.






참 아름답지 못한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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