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여행 중 슬럼프는 처음이지?

행복한 슬럼프였다

by 안녕씨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하다 보면

많은 것들이 좀 더 견디기 수월해진다


책 나에게도 서른 살이 온다면






고3에게나 올 법한 슬럼프가 나에게 왔다. 그토록 원하던 여행이었는데 여행 중에 슬럼프라니, 나는 무안해졌다. 빠이 Pai 에서였다.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이어간 지 한 달을 조금 넘겼을 때였다.


여행 일정이 고되긴 했다. 베트남 하노이 Hanoi에서 후에 Hue로, 그리고 호이안 Hoian으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넘어간 다음

버스를 타고 다시 국경을 넘어 태국 방콕 Bangkok, 치앙마이 Chiangmai , 그리고 빠이 Pai. 국경이 맞닿은 곳이긴 했지만 무려 한 달 동안 국경을 3번이나 넘었다. 체력이 방전될 수밖에 없었다. 체력이 국력이란 뻔한 얘긴 하고 싶지 않지만 약해진 체력은 곧 나약한 생각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무엇을 위해 나는 이렇게 바삐 달려왔나?부터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침투했고, 그 생각이 날 괴롭혔다.


사실 빠이는 꼭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언젠가 읽은 세계 여행자의 안식처 빠이라는 책 영향이었다.


- 여행자로 하여금 정원을 가꾸는 마음을 갖게 하고 더 나아가 장기 체류하게 만드는 곳


- 사랑하는 사람과 빠이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 있게 행복이라고 여행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곳


- 스쿠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세상에 이런 곳이 감탄사를 3번 반복하게 되는 곳


책을 읽고 빠이라는 두 글자를 내 가슴에 새겼다. 궁금했고, 호감이 생겼고, 그래서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원하는 장소에 도착했는데, 이상했다. 나는 시큰둥했고, 별 감흥이 없었다. 마음이 간사해서 원하는 걸 막상 손에 쥐니까 시시해진 걸까. 구불구불 험난한 길을 통과하며 도중에 버스가 가지런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차가 전복될 만큼 아찔한 경로였다) 위험천만하게 왔는데 이러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착하고 가라앉은 감정을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수습은 잘 안 됐고 오히려 , 꽤 잊고 지내던 현실 문제 가령, 불확실한 내 미래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날 더 가라앉혔다. 나는 그렇게 어두운 굴 속에 내팽게쳐졌다. 생각을 해서 생각이 사라지겠냐마는 그래도 그 생각을 멈춰야 했기에 나는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잠이 스르르 하고 오지 않았기에 양 세는 일을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마리... 한 백 마리쯤 셋을까. 그때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잠이라는 보약을 한 사발 마신 나는 괜찮아졌다. 꽤 많은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는 엔딩 크레딧만을 남겨두고 TOMMORROR IS ANOTHER DAY라는 명언을 남겼다. 삶의 굴곡짐이 남북전쟁, 기아, 살인, 사별, 자식의 죽음을 겪은 그녀와 비교가 되겠냐만은 나에게도 새로운 날은 그 자체로 긍정의 에너지였다. 그리고 방갈로에서 맞이한 아침은 더 특별했다. 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별채, 마냥 보기 좋아 보이는 외견과 달리 벌레의 습격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됐지만 필요한 것만 있는 숙소는 나를 조금 가볍게 만들어줬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오버랩됐다, 하나씩 사모은 물건들이 어느 순간부터 필요한 물건을 찾는데 방해가 되었고, 더 나아가 내 안락한 숙면에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여행자인 나는 캐리어 하나를 초과하지 않은 물건들로도 하루하루를 영위하고 있었고, 그 간소한 물건들은 나에게 가뿐함을 선물로 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뿐한 상태로 방갈로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섰다. 햇살이 눈 부신 날이었다. 싱그러운 햇살이었다. 나무와 방갈로로 둘러싸인 예쁜 길을 걸었다. 숙소를 걸으며 햇살을 오롯이 흡수하는 그 자체가 힐링이었다. 비싼 숙소는 아니었지만 자연을 경험하게 해주는 곳, 숙소의 선택 기준 하나를 더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어제의 칙칙함을 많이 떨칠 수 있게 됐다.










소나기가 내려야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걸까? 빠이에서의 아침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고 평화로웠다. 토스트 한 따끈따끈한 식빵에 갓 내린 커피를 마시고, 열대 과일을 섭취했다. 순둥순둥 한 강아지 한 마디가 곁에서 게으른 잠을 자는 그런 아침이었다. 무엇을 바랄까 싶었다.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고, 빠이 투어를 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꽤 마음이 맞는 여행자들을 만났다. 여행을 즐겨 다니며, 연령대까지 비슷한 삼십대의 여자 넷이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싱글의 여자 직장인에겐 꽤 공감할 만한 소재가 많았고 거기에 다시 못 볼 가능성이 높은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터놓기 힘든 서로의 은밀한 이야기를 와인의 힘을 빌려서 술술 나오게 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은밀한 이야기는 단순히 알코올의 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폐 타이어를 십분 활용한 물놀이라는 추억이 있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함께한 시간이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해보겠다.

그렇게 나는 전날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있었고

그 날 이후 나의 여행에 슬럼프라는 세 글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가끔

회사 일에 치이고

사람 관계에 치여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나는 빠이를 생각한다.

그리곤

잠시 잠을 잘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볼까?

산책을 해볼까?

아니면 친한 친구를 불러서 맛있는 걸 먹으며 소소한 농담을 주고 받을까?

를 생각해본다


꼭 비행기를 타고 환경을 바꾸지 않아도 지금을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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