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탈 나기 하루 전

작은 물방울이 폭우보다 더 위협적일 수도 있다

by 안녕씨
비가 내리는 베트남 시장 풍경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우비 하나만 입은 채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세찬 비가 자꾸만 시야를 흐렸지만 유일한 이동수단인지라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보이는 건 빗줄기, 들리는 건 우렁찬 빗소리, 내가 할 수 있는 건 페달을 밟아 앞서 가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옷이 젖을까, 신발에 물이 고일까, 화장이 지워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로 달려가 미끄럼틀을 타곤 했다. 놀이는 단순했다.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한 후 진 사람이 벌칙 수행으로 미끄럼틀을 타면 됐다. 관건은 내려오면서 미끄럼틀 아래 고인 물웅덩이를 피할 수 있는가 여부였다. 참 즐거웠던 그때가, 잊고 있었던 그때가 자전거 페달을 밟는데 스쳐 지나갔다.


십 여분쯤 달렸을까. 작은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셰프를 만나 중요사항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곤 나에게 와 마른 수건을 건네줬다.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그는 이어 화장실을 안내해줬고, 손을 씻으라고 했다. 근데 돌린 수도꼭지에서 황톳물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투명한 빛깔의 깨끗한 물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그만 충격에 휩싸였다. 가뜩이나 비에 젖어 찜찜한 데, 이 레스토랑, 믿어도 될까. 쿠킹클래스에 대한 건강한 의심이 싹텄다.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식재료를 사러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숨도 돌릴 겸 코코넛 타임을 갖자고 했다. 이날 쿠킹클래스 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나뿐이라서 여러모로 가이드가 고생을 했다.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베트남의 배수시설은 (내 기준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폭우가 내리긴 했지만, 내리는 비가 정직하게 차곡차곡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홍수가 지나간 현장 같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빨강, 주황, 핑크, 노랑, 파랑, 보라 컬러풀한 우비를 입고, 무심히 제 할 일을 했다. 상인들은 팔고 있는 물건이 비에 젖지 않게 안전지대로 옮겼고, 행인들은 타고 가던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오토바이와 함께 걸었다. 시카고에 갔을 때 미국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었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바로 연상해내는 한국 사람인 나는 우비를 입고 지나가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면서 시카고를 떠올렸다.


시장 한복판에서 코코넛을 마시는데, 가이드가 물었다. "혹시 숟가락 필요하니?" '코코넛의 과육, 먹을만 하지'하면서 달라고 했다. 가이드는 곧바로 주인 아주머니에게 숟가락을 요청했다. 아주머니는 정체 모를 곳에서 숟가락 두 개를 꺼내선 내리는 빗물을 향하더니 더러운 행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허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그 문제의 숟가락으로 과육을 덜어내 조심스럽게 한 입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숟가락이 닿지 않은 부분의 아주 소량의 코코넛 과육을 맛봤다. 그게 전부였다.


재료 몇 가지를 구입한 후,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 수업은 순조로웠다. 준비된 재료를 자르고, 넣고, 볶고, 삶고, 버무리기만 하면 됐다. 세 가지 베트남 전통 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더니 내가 배우면서 만든 요리가 정갈하게 세팅돼 있었다. 가이드와 같이 나눠 먹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빗줄기가 보였고, 빗소리가 들렸다. 비를 피할 수 있어설까. 맛있는 음식과 함께여서 일까. 아까와 다르게 비 내리는 베트남이 운치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다. 아침을 못 먹은 데다 자전거 타느라 열량 소비도 많았지만 황톳물의 안 좋은 기억을 극복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소라면 남김없이 흡입했을 음식들을 많이 남겼다.


식사가 끝날 무렵, 가이드가 물었다. "근데, 너 숙소까진 어떻게 갈 거야?" 그 질문은 날 멘붕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투어는 픽업이 포함돼 있었는데....' 과거를 훑어봤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하는 건 과거의 기억을 끊고, 당면 과제에 매달리는 일이었다. '오는 길에 택시도 못 봤는데, 숙소까지 어떻게 가지? 밖엔 하늘이 뚫린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비가 내리고 있는데....' 내 머리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그런 내 당혹함이 표정에 묻어났을까. 가이드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후, 가이드는 멋짐이라는 게 폭발하는 빨간색 오토바이와 함께 등장했다. 오토바이에 대해선 1도 모르지만 베트남 '인싸'들이 타는 오토바이의 외양이었다. 헬멧을 건네받아 쓰는데, 그가 매듭을 채워줬다. 헬멧은 내게 생소한 것이었으니까 덕분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헬맷을 안전하게 착용하려고 헤매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오토바이 뒤에 올랐다. 역시 그가 도와줬다. 스쿠터와 달리 꽤 높은 위치에 앉을 곳이 있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자리 잡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는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는 곧 출발했다. 근데 정체 모를 환호 소리가 들렸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도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레스토랑 여직원들이었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리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셀럽이 된 기분이 이런 걸까. 셀럽이라면 기뻐했을 그 관심이 난 어색하고, 어리둥절했다. 난 셀럽이 아니니까.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거기 다녀왔니? " "아직, 좋아?" "그럼 내가 안내해줄게. 저렴하게" 물론 이런 대화만 나눈 건 아니지만 즐거운 대화 도중 튀어나온 이해타산은 내 유쾌함을 덜 유쾌한 것으로 희석시켜 놓은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비록 찰라 같은 순간이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줄리아로버츠가 사랑하게 된 리처드기어가 집을 사주겠다고 했을 때, 눈물 흘리며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어렸을 때 잘못할 때마다 엄마는 날 다락방에 가둬놓곤 했어요. 그럼 다락방 안에서 왕자님이 짠하고 나타나 날 구출해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곤 했어요. 근데 지금 당신은 나에게 집을 사주겠다고 하네요." 기대가 불쑥 튀어나온 부주의한 진심 때문에 씁쓸해지는 것, 나는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오토바이 위에서 희끗희끗 본 풍경은 이렇다. 잿빛 세상이었다. 하늘도 흐렸고, 바닥도 흐렸다. 애초부터 탁했는 지 아니면 곧 탁해질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빗줄기가 끊임없이 거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내린 비가 무릎에 닿을 만큼 고여있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는 도로가 아닌 물속을 달리고 있었다. 내 오토바이는 아니었지만 부식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렇게 숙소를 향해 달리는데, 오늘이 언젠가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추억이라는 포장지를 덮고, 아련하면서도 그리운 모습으로 미래에 나타날 것 같았다. 그런 하릴 없는 생각을 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씻고 잠이 들었다. 오후 2시쯤이었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자고 일어났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첫 번째 화장실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화장실을 갔다. 사태가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화장실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선잠이 들었다. 다시 깨서도 화장실을 갔고, 그러면서 화장실도 자주 가면 지칠 수 있구나를 깨달았다. 지쳐 누워 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만 하루를 꼬박 그랬다. 그랬더니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는 시간이 얼마 안 남게 됐다. 베트남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었다.


공항 갈 채비를 시작했다. 인풋 없이 아웃풋만 주구장창 했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샤워는 해야 했다. 힘겹게 샤워를 마치고 샤워부스를 나오는데, 제대로 미끄러졌다. 뚝뚝 떨어진 작은 물방울이 이렇게 위협적인 존재로 바뀔 수도 있었다. '샤워부스 앞에 수건을 놓는다는 게' 때 늦은 후회였다. 아픔 하나가 더 추가됐다. 걸을 때마다 통증 때문에 얼굴이 찌뿌려졌다. 못 생겨졌다. 하지만 아프다고 징얼거릴 수 없었다. 징얼거릴 대상도 없었거니와 할일도 산더미였다. 체크아웃도 해야 했고, 짐도 챙겨야 했다. 왜 나쁜 일은 늘 연달아 일어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공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항 도착하기 전까지 아니, 화장실을 곁에 두기까지 배가 무탈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일주일 넘게 날 고생시킨 탈 나기 하루 전 이야기다. 뭐가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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